아름다운 사진, 객관적인 글.
열린사회의적 2008/04/0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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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아주 사소한 일기,
어쩜 어린아이가 첫 일기를 쓰고 선생님에게 억지 검사를 맡기 위해 내미는 느낌.
이 글에는 감정의 과잉 대신에 아주 차분하게, 글이 적혀내려가면서, 산과 사람, 사람과 사람, 나와 세계에 대한 성찰이 숨어 있어 읽기에 큰 부담이 ㅇ벗다. 즉 그의 글길을 따라가면 순례가 끝이나고, 책속에 펼쳐진 사진을 보면 쿰부에 닿게 된다. 간간히 고소 증세에 대한 지은이의 염려와 똑부르지게 이루어짐을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도 좋을 듯 하지만...
여행은 개인의 문제이다.
'우리는 순례 엿새 째 되는 날도 하루 종일 하이랜드 셀파 리조트에서 빈둥빈둥 놀았다(66쪽)'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그의 글은 객관적 진실성이 보장되지만, 적어도 나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읻. 하루 종일 리조트에서, 고소 증세를 위해 놀 것인가, 잠시라도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흉내를 낸다 한들 어떠랴, 그 자세가 있은 다음에 성찰이 따라오게됨이 순리이니, 성찰의 깊이를 논하기 앞서 행위를 먼저 이루어야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 나눠봄도 좋을 듯 한데...
(어쩜 지은이는 네팔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 타성에 적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분명한 것은, 산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 사진으로도 빠질 듯 하니 글이 얇다면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듯 하다.
뫼(山)를 등정(登頂)하는 것일까? 나는 경외하며 코라(순례)도는 것일까? 네팔 안나 푸르나 앞에 서기 앞서, 티벳 강 린포체 앞에 서기 앞서 난 내게 묻고 답을 얻을 것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초모룽마, 순례라는 말에 큰 동감을 가지지만 아쉬운 점은, 여기서 한 발 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별외,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나는 정복함에 두느냐 경외함에 두느냐에 갈린다고 생각한다. 정복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신'적인 존재이기에 지구를, 그의 의지대로 재창조할 수 있게 한다. 하늘에는 하나의 신이 계시다면, 그 신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는 '사람' 역시, 지구 상에 '신의 아들'이 되며, '지구의 신'이 된다.
동양은 이와는 다르게 본다고 생각한다. 도올 김용옥의 책( '앙코르와트.월남을 가다' )을 오후에 잠시 보았는데, 그는 두려움과 경외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근함을 같이 본다고 했따. 두려움이 경외감으로 대등하고, 경외감은 친근함으로 전이된다. 즉 호랑이는 두려움의 존재이지만 꽃감보다 무섭지 않은 친근한 존재이다. 동양의 사고는 두려운 존재는 겸손함과 같고, 그 겸손은 다시 친근함을 옆에 앉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자연 앞에서도 함부로 함이 없으며, 친근하게 다가간다. 티벳의 강 린포체를 코라 도는 사람과 지리산에 오르는 남명 조식 선생님의 행위는 겉모습은 다를 지언정 그 근본은 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인간의 자아성찰로 이루어진다. 어쩜 동양에서는 가장 큰 스승은 '자연'일 것이다. 이는 정복과 재조합을 통한 창조 행위를 함부로 할 수 있는 서양의 사상과 크게 엇난다.
* 동양과 서양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데, 동양은 유,불교 문화권으로 서양은 흔히 말하는 기독교 문화권으로 할 때, 이슬람 문명이나 여타의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는 협소함에 머무른다. 그렇기에 위에 별외에 들어간 동서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유,불교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기준으로 삶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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