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독후감을 읽는게 뭐 대단한게 있을까만은. 장정일의 그것은 책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
책을 빌미로 한 세상 씹어대기, 혹은 자기 생각 토해내기에 더 가깝겠다.
물론 그의 코드와 취향이 내게 맞기때문에 그의 독설에 내가 낄낄거릴 수 있는거겠지.
이를테면, 복거일에 대한 '사족2)'가 나를 뒤집어지게 한다.
사족2): 이 독후감을 읽은 독자 가운데, 복거일을 '병약한 지식인'으로 행여 오해할지도 모를 독자를 위해 한 마디 더 보탠다. 복거일은 '병약한 지식인'이 아니다. 영어가 강대국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나라의 고용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독도 분쟁으로 손해를 볼 나라는 일본보다 약소국인 한국이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는 양보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복거일이 '힘과 정복'이라는 맹목적 가치의 신봉자라는 것을 보여주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주의 지식인'부류에 넣지만, 나는 몇 권이나 되는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 번도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다. 민족주의를 비난하는 대신 그가 편든 것은 다민족간의 공존모색이 아니라, 제국주의다. 이 점이 그의 사상 부재를 증거하는 한편 모순을 나타낸다. '자유주의'는 그의 독단과 기능적 제국주의를 눈가림하는 위장술이다. 어떤 독자가 말했다:
"복거일은 그 괴상한 이름 말고는, 한번도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없다!" (p.135)
그리고 나를 반성케 한, 그의 따가운 충고.
잠언에 밑줄을 치는 한, 우리 나라의 소설 독자들은 아직 소설을 취급할 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잠언에 밑줄을 치는 소설 독자는 소설 속에서 교훈을 발견하도록 편향된 질낮은 문학 교육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잠언에 밑줄을 치는 독자는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일에 긍지를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소설 가운데서 잠언을 발견하고자 하는 안쓰러운 노력은 소설나부랭이를 읽는 소모적인 일을 뜻있게 만들자는 보상심리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잠언의 발견으로 요약되는 그럴듯한 교훈이나 주제 찾기에 편향된 독서는 소설의 내적 구성과 미적 장치에 대해 무지한 독자를 쏟아내 놓는다. (p.162)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독서란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주제를 발견하거나 구성을 파악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방식의 독서는 삭막한 신체해부 작업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독서는 책의 내용과 형식에 구속됨이 없이 곧바로 저자의 열정과 조우하는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 1급의주제와 최상의 형식이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다만 저자의 금강석 같은 열정과 대면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p. 176)
그의 이 매서운 질타에서, 나는 책에 대한 그의 열정과 대면했던 거겠지?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