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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곰팡이
내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뇌까린 한마디...그래 너 잘 났다... -,-

해설이나 역자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소설은 잘 된 것이 아니다.

이따금 튀어나오는 몽환적인, 비현실적인 상황과 거기서 안개처럼 흘러나오는 독특한 감성은 충분히 훌륭하다. 그러나 그 모든 재능들이 오로지 자신을 자랑하거나 변명하려고 하는 것만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때때로 그 자신을 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술하는 것은 신선했다. 하지만, 허구라는 소설의 무기를 들었으나 사소설, 고백소설이라는 점에서 주인공 두오미는 분명 작가 자신일진데, 스스로를 바라보는 그 자아도취의 시선이 내내 거북살스러웠다. 특히 표절이라든가 유산, 결혼등에서는 소설을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자기의 지난 생을 '남김없이 토해'냈다는 그 처절한 문구에 걸맞지 않게도 지나온 생에 대한 나르시즘적 서술만 난무할뿐 자기 반성이나 성찰의 자세를 찾지 못한 것은 내 미숙한 독서탓일까.

린바이가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그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니다. 린바이가 린바이로 살아왔던 것, 적어도 그 절망에 대해서는 확실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린바이, 혹은 두오미의 삶이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대표할 순 없다.

남자보다, 혹은 그만큼 강해지고 싶고(나는 이런 생각에게서 위험을 느낀다), 남들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고 싶고, 그러나 별다른 수 없이 남자에게 의존적이고 순종적인 두오미는 확실히 교육으로는 페미니즘의 이론을 주입받았으면서도 전통적인 가부장권의 여성으로 살아왔던 많은 여성들의 딜레마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소설이 그 딜레마를 부각시킨다거나 거기서 오는 갈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소설은 내내 자아도취와 자기합리화에 그 모든 자리를 할애했다.

또한 육욕이 없었기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부분에서 나는 린바이의 의견에 반대한다. 이것은 동성애가 육욕만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치명적 위험을 안고 있다.

비록 이 소설에서 많은 실망과 짜증스러움을 얻었으나, 그녀의 몽환적인 상황들과 그것을 더욱 찬란하게 만드는 감성덕에 그녀의 다른 소설은 어떤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정말 이 소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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