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장편소설
창비 출판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무국적자이자 이방인. 성은 로 이름은 기완.
‘나’는 탈북민 로기완이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고백한 한 줄의 문장을 읽고 대본 대신 글을 쓰고 싶었고, 익숙했던 세계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방송국 작가를 그만두고 로기완을 찾기 위해 그를 안다는 H 객원기자인 박을 찾아 브뤼셀로 향했다. 방송 욕심으로 수술을 미루게 한 아픈 윤주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그런 윤주를 뒤로 한 채 도망쳤다. 삶의 무엇을 보았기에. 나는 로의 무엇을 알기 위해 로의 흔적을 따라간 것일까.
5년 동안 방송을 함께 했던 류재이 피디. 고통 받는 사람들의 방송은 그들을 연민하게 만들다가 결국 자신들의 연민을 생각하게까지 했고, 감정은 전이된 듯 우울하게 빛나게 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뒤로한 윤주의 수술 소식을 재이에게서 듣는다.
왜소한 체격의 로는 가진 돈으로 버틴다.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봐야했던 마음도 슬펐을 텐데 죄를 용서받는 듯 배움, 일자리 기회가 오면 성실함으로 온 몸을 다한다. 무엇이 로기완을 그렇게 만들었나. 로에게 박은 자신의 죄의식때문에 선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로는 브뤼셀이 북한과 다른 것은 환경뿐만 아니라 체제가 문제였다는 것을 알아간다. 하지만 당장에 닥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로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벨기에의 거리이름을 일기장에 적어나갔다. 자신이 걷는 길이 브뤼셀에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려고 적은 걸까. 여기 있는 이유를 찾고 싶어였을지도.
설명할 수 없는 영화 속 한 장면, 책 속 한 문장, 누군가의 사진을 보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과 훌쩍 떠나서 그 상상만 했던 장면들과의 조우. 만나러 가는 동안의 이유와 만난 이후의 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과정들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얼마나 뒤바꿔 놓을지 그려보는 시간들을 갖게 했다.
소설을 읽은 후 넷플릭스 로기완을 만났다를 요약으로 보았는데, ‘나’의 시각으로 ‘로’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기에 영화는 책의 내용과 많이 달랐다. 책 속의 이니셜L에 지나지 않았을 뿐인 인물을 이제는 이니셜K로 불러야겠다는 그 이유들이 빠져있는 영화는 제목만 책과 같을 뿐.
소설은 로를 찾아가는 내내 숨가쁘게 몰아닥쳤고 로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준 ‘나’, 이니셜K는 어떻게 그의 삶으로 자세히 들어갈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마지막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나에게 증여되었다’
ㅡ○ 책 속 밑줄 긋기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니셜L처럼. P11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 저편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기근에 허덕이는 거대한 공동체가 분명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것이 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그 세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머나먼 연회장을 초대장도 없이 찾아온 이상한 방문객이 된 것처럼, 고향을 떠올린 그 순간 로는 스스로가 이유없이 부끄러워졌다.
P49 북한 연길과 벨기에 브뤼셀을 보며 로가 느낀 감정
어쩐지 모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악의적으로 확인하며 타인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미성숙한 인간처럼 나는 얼떨결에 묻고 있었다. P56
진심이란 것에 병적으로 엄격했던 우리는 언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 역시 가변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협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감정적 차원의 진실이란 한순간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추억을 헌납하며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유된 약속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이 조심스럽게 준비해놓은 구체적인 사건들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보듬어준다고 믿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연인이 시작되자는 식의 선언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을 관통한 후에 손안에 들어온 서로에 대한 신뢰감, 이 사람이라는 안도감, 시시콜콜 말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일과 일상, 그런 것들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P72-73
피상적인 고통이 때때로 진실을 회피하듯 우리의 지난 시간도 한낱 픽션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편집된 필름처럼. P74

어떤 사람에겐 위로도 뜻대로 해줄 수 없다. 그 위로의 순간에 묵묵히 소비되는 자신의 값싼 동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치환되지 못한 감정은 이렇게 때때로 단 한 번도 조우한 적 없는 타인의 삶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P112

자신의 만족을 위해 경계 밖에 서 있는 타인을 함부로 대한 것, 존엄하게 대하지 않은 것, 나는 그런 것 때문에 화가 나 있다. P131
유한한 시간 속에서 마모되는 인간의 체취 P137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늘 결핍된 대상이다. 누군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나는 무력했고 아무것도 몰랐으며 항상 너무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느 지점에서 고조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삶 속으로 유입되어 그들의 깨어 있는 시간을 아프게 점령하는 것인지, 나는 영원히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P151
자신들이 통역을 하고 조사를 받는 사무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관계로까지 이어질 거라는 것을, 가장 감추고 싶었던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서로에게 되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P179
뜨거운 입김이 없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이 편집된 필름처럼 한낱 픽션에 불과했을지라도 네가 안쓰러워 너를 지켜주고 싶었던 내 마음은 언제나 내가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노라고도. P206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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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니셜L처럼. - P11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 저편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기근에 허덕이는 거대한 공동체가 분명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것이 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그 세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머나먼 연회장을 초대장도 없이 찾아온 이상한 방문객이 된 것처럼, 고향을 떠올린 그 순간 로는 스스로가 이유없이 부끄러워졌다.
P49 북한 연길과 벨기에 브뤼셀을 보며 로가 느낀 감정
- P49
피상적인 고통이 때때로 진실을 회피하듯 우리의 지난 시간도 한낱 픽션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편집된 필름처럼. P74- P74
어떤 사람에겐 위로도 뜻대로 해줄 수 없다. 그 위로의 순간에 묵묵히 소비되는 자신의 값싼 동정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으로도 치환되지 못한 감정은 이렇게 때때로 단 한 번도 조우한 적 없는 타인의 삶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P112- P112
자신들이 통역을 하고 조사를 받는 사무적인 관계에서 인간적인 관계로까지 이어질 거라는 것을, 가장 감추고 싶었던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서로에게 되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을. P179- P179
뜨거운 입김이 없었던 우리의 지난 시간이 편집된 필름처럼 한낱 픽션에 불과했을지라도 네가 안쓰러워 너를 지켜주고 싶었던 내 마음은 언제나 내가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노라고도. P206- P206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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