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조정에서 핵심적인 사건은 1942년 뉴욕 빌트모어호텔에서 열린 중요한 시온주의 회의에서 이른바 빌트모어 프로그램Biltmore Program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전환할 것을 공개적으로요구했다. 정확하게 요구한 내용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공화국 JewishCommonwealth으로 창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95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이 허약하고 파편화된 것과 대조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은 힘이 있고 외부의 지원까지 받고 있는데, 아랍의 신생독립국들-이라크, 트랜스요르단,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역시 취약하고 증오에 찬 분열에 시달렸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나라들의 경쟁적인 야심과 씨름해야 했다.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보호를 강제하려고 하면서 이집트의 파루크 국왕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과 경쟁했다. 다른 아랍 지도자들은 이따금 시온주의 운동과 복잡하고 모호하며 뒤가 구린 접촉을 하면서 종종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손해를 끼쳤다.- P107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 아지즈 국왕은 1945년 봄 병든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미국 전함 위에서 회동했다. 미국 지도자가 사망하기 몇 주 전이었다.
국왕은 미국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그곳에서 어떤 행동이든 취하기 전에 아랍인들의 의- P108
견을 구하겠다고 대통령에게 확실히 약속을 받아냈다. 루스벨트의후임자인 해리 트루먼은 별생각 없이 이런 약속을 무시했지만, 사우디 정부가 미국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은 항의를 하거나 팔레스타인인의 편에 서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은 여섯 아들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종속 상태, 그리고 미국 정치 체제의 작동과 국제정치에 대한 아랍 통치자들의 대를 이은 무지 때문에 아랍 세계는미국의 영향력에 저항하거나 미국의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 정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활용했다. 이 운동은 테오도어 헤르츨이나 하임 바이츠만처럼고등 교육을 받은 동화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또한 미국에 깊은 뿌리를 두고 폭넓은 연계에 의지했다.- P109
아랍 국가들은 나크바 이후의 이러한 정치적 공백 상태를 손에 넣었는데, 압둘라 국왕이 다스리는 요르단의 경우처럼 많은 나라들이이미 팔레스타인인들을 자국의 통제하에 두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은 자국의 의제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아 강력하고 호전적인 이웃 이스라엘과 충돌을 피하면서 이스라엘의 강대국 후원자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아랍 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저강도 전쟁에 저항하면서 그들의 동맹자가 되기는커녕그들의 노력을 방해하고, 때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적과 공모했다.
요르단이 으뜸가는 사례인데, 압둘라 국왕은 요르단강 서안을 병합한 뒤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표출을 확고하게 억눌렀다. 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조직을 이루거나 공격을 가하는 것을 막았다.- P136
이스라엘 점령군이 1956년 11월 가자의 소도시들과 칸유니스와 라파의 난민촌을 휩쓸면서 450명이 넘는 민간인 남성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즉결 처형을 당했다. 유엔난민구호기구 사무총장이 작성한 특별 보고서에 따르면, 11월 3일 칸유니스와 이웃한 난민촌에서 벌어진 첫 번째 학살 당시, 남자 275명이 총살당했다. 1주일뒤 11월 12일 라파 난민촌에서는 11명이 살해되었다. 11월 1일에서21일 사이에 또 다른 66명이 총살당했다. 유엔에서 요르단 대표로참석한 무함마드 엘파라Muhammad El-Farra가 칸유니스에 살던 사촌 몇명이 일제 검거되어 처형당한 과정을 회상할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의 사망은 페다인을 수색하는 부대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유엔난민구호기구 보고서에 의해 허구임이 낱낱이 드러났다. 민간인들이 살해된 것은 가자지구에서 모든 저항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수에즈 전쟁 이전에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데 대한 보복임이 분명했다. 1948년의 선례와데이르야신을 비롯해 최소한 20군데의 장소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사실, 그리고 1950년대 초 키비야 같은 곳에서 기습 공격으로민간인 사망자가 많았던 점을 감안할 때,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소름끼치는 사건들은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군의 전형적인 행동 양상의 일부였다. 학살에 관한 뉴스는 이스라엘에서 공개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에 동조하는 미국 언론들도 감추기 급급했다.-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