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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있는 곳이 집
  • 왕겅우.왕마거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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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6-09
  • : 280
1947년 중엽까지 중국행을 늦춘 덕분에 두 가지 혜택이 내게 돌아왔다. 받아놓은 졸업증서가 싱가포르의 새 대학 지원을 위한 자격을 충족해주었다. ‘비상사태’란 이름의 반영 항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나처럼 현지 출생도 아니고 국적도 없는 중국인의 신분은 입학 자격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버지도 말라야가 자리잡아 살 곳이라는 생각을 점차 받아들이셨다. 지역 중국인 중 타이완의 중화민국 지지자들과 베이징의 신중국 지지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부모님은 마음속으로 예상하면서 내가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기를 바라신 것 같다. - P18

앞선 회고록 1권 후기에서 왕겅우의 싱가포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었다. 싱가포르로 가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상황이었다. 나뉘어진 정치적 선택지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말라야 현지의 정치적 혼란도 한몫 했다. 말라야 연방이 말라야 공산당이 독립을 위해 세운 말라야 민족해방군을 상대로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가 입학한 말라야 대학은 영국인 관리의 행정을 도울 현지인을 훈련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 곳이었다. 일종의 제국 시민을 키우기 위한 곳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영국식 교육에는 익숙하면서도 현지 동남아시아 시스템과 역사를 이해에 대한 인식력은 약했다. 왕겅우는 말라야 출생이 아니었기에 특히나 정치 활동 참여, 반제국주의 발언 등에 조심해야 했다. 말라야 대학은 입학 때 전공을 고르지 않고 3년 간 통합으로 공부하다가 학위를 받은 후 최종적으로 전공을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말라야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를 써서 지방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작에 한계를 느껴 문학의 길은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을 느낀 것이 아닐까. 외국인이 외국 문학의 길을 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라야 연방 지역 사회를 둘러싸고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이해 충돌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말레이 공산당이 해산된 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싱가포르와 말라야 연맹 간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싱가포르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공부해야 했다.
1950년 마리아 헤르토흐 폭동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이렇다. 마리아 헤르토흐의 네덜란드인 가톨릭교도 아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하고 있다가 1942년 일본 점령 때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 유라시아 혼혈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갈 때 마리아를 한 말레이 여인에게 맡겼다. 그 여인은 마리아를 딸로 입양하고 자기 고향 트렝가누에 데리고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아의 아버지가 딸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가 양모를 찾아 싱가포르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이곳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는 마리아가 네덜란드인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말레이 양모가 항소에서 이겨 풀려난 어린 마리아를 말레인 총각과 결혼시켰다. 네덜란드인 아버지가 재항소를 통해 결국 마리아의 양육권을 확보했다. … 판사는 마리아가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수녀원에서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마리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하는 것 아니냐는 감정적 반응이 나왔다. 마리아가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로 가라는 판결이 나오자 폭동이 시작된 것이다(P82~83). 군중은 유럽인만 보면 싸움을 걸었다.
그는 이 사태를 통해서 싱가포르의 현실과 제국주의가 종식된 후 탈식민, 신민족국가 건설의 험난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학생회 일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꼈다. 그가 문학을 접고 역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어떤 종류의 배타주의에도 반대하겠다는 내면적 변화와 정치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생긴 결과였다.

그는 영문학 학도인 마거릿을 만나게 되었다.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베다 림이라는 사람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얻어 대학 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녀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니 공통적 관심사가 있기도 했다.
마거릿 덕분에 전에 별로 생각지 않던 ‘사랑’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랑 노래를 많이 알고 그 말을 멋대로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 말을 쓰는 방법이나 함축하는 의미는 확실히 안 적이 없었다. 마거릿을 만나면서 그 말이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일어난 변화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수수께끼다. 사랑이란 소리 없이 자라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내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 가정, 자유와 관계가 크다는 것만 안다(P132).

마거릿은 역사학 공부를 위해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당시 영국 식민지인으로서는 영국으로 가는 유학이 최고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양 등지에서 쑨원과 혁명 동지들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료 조사를 위해 홍콩으로 출장을 떠난다. 홍콩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정치 활동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중심지인 만큼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영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필리핀, 실론,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중국인의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원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으나 10세기 중국 오대사 연구로 주제를 변경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와 관련 직접 자료가 부족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 초기 기록을 통해 남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게 된 만큼 인도양에서 기원한 문명에 중국 교역이 뒤섞이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영국으로 떠나오고 1년쯤 뒤 마거릿이 영국으로 공부를 위해 왔다(영국으로 오기 전 두 사람은 약혼만 한 상태). 그러나 학교의 위치가 서로 달라 주말마다 만나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활에 지쳐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부모가 잠시 런던에 왔을 때 두 사람은 결혼 예식을 올렸다. 케임브리지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뒤 파리에서 첫 아이를 힘들게 낳았다. 아이가 태어날 때 탯줄이 엄마 목에 칭칭 감겨 있어 한동안 격리되어 지낸 통에 왕겅우는 아이와 그녀를 바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1957년 말라야 연방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싱가포르로 돌아온 뒤 부부는 바로 일을 시작했으나 얼마 후 일 때문에 쿠알라룸푸르로 가게 되었다. 그는 남양 화교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동남아시아에서의 화교에 대한 위치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강연도 호평을 받으며 책으로 출판까지 되었다고.
그무렵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까지 관심을 뻗쳤고 동남아시아판 나토인 시토(SEATO)를 조직한다. 그는 1960년 미국 아시아 관련 연구소를 둘러보고자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연구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거릿은 미국의 영어 교육기관을 시찰해달라는 요청으로 미국 대학을 돌아본다. 그는 1961년 1년간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소아스에서 명나라 초기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한다. 1962년에는 말라야 대학에 돌아와 문학부 학과장을 맡았다.

1963년 말레이시아 통합에 반대하는 수카르노 콘프론타시 폭력이 시작되었다. 말레이시아는 국제 승인을 위해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싱가포르에 잔혹한 폭동이 일어나자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는 공식 협상에 돌입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 결국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합에서 떨어져 나오고 인도네시아 PKI는 파괴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은 진격했고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 벌어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상황은 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최규하 주말레이시아 한국대사 덕분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이기백, 김준엽과 만남을 가지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그때 중국 관련 연구를 집중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세운 일이었다.

1968년 이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말레이시아가 고향과 다를 바가 없다. 자기 집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더는 현대 중국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중국사 연구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행히 마거릿도 부모님도 그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얼마 후 돌아오려 했으나 1969년 쿠알라룸푸르에 폭동으로 국가 비상 상태가 발생하자 귀환을 미루었다(그 사이 그의 아버지는 1972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18년 간 그곳에서 삶이 이어졌다.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1996년 싱가포르로 이주해 24년째 살고 있다 한다. 마거릿은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있는 곳이 집’이라는 제목은 그의 삶(의 경험)을 그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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