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에서 이 책을 접했다. 마침 '역사 속 여자' 시리즈 4권을 읽고 난 뒤라 더 반가웠다.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잘 보기 힘들기에 이 책이 소중하다고,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남성인 자신은 헤아리고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며 직접 읽어보시고 각자가 평가하길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책의 주인공은 타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가 전달된 고려의 조씨 부인과 조선의 기생 가련이다. 조씨 부인이 경험에 기반한 생생한 기억이 있음에도 직접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경우라면 기생 가련은 기록을 쟁취하기 위해 남성 지식인을 이용한 경우다.
1270년 개경 환도를 반대하며 삼별초 항쟁이 시작됐다. 이때 조씨의 아버지는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가기 위해 머물러 있다 삼별초 군에 붙잡혀 남쪽으로 내려가는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꾀를 쓴 그는 배를 돌려 무사히 개경으로 귀환했다고. 그러나 이후 그는 삼별초 진압을 위해 진도에서 제주도로 내려갔다가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 상황에서 궁금했던 것은 조씨의 어머니의 이야기였는데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녀는 13살의 나이로 자신의 집안과 비슷한 계급인 하급 무관 한보에게 출가한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몽골에 공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그녀가 조혼을 했을 확률이 높지 않았겠냐고 작가는 말한다. 1281년 2차 일본 원정 때에는 그녀의 시아버지가 사망한다. 당시는 여름이었기에 전염병이 있었던데다 1차 원정 때 경험으로 일본은 대비를 더 잘할 수 있었다. 조씨 부인이 27살 되던 해에는 남편마저 전투에 나갔다 사망한다. 당시 전투는 정식 싸움은 아니었으나 쿠빌라이 반란을 일으킨 카다안이 고려까지 밀려 들어오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 피해가 무척 커서 조정은 다시 강화로 피란을 가야할 정도였다 한다. 여기서 그녀의 악재는 끊이지 않는다. 딸이 1남1녀를 출산하고 나서 그녀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이후 조씨 부인은 길쌈 등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면서 생계를 이었다.
손녀 사위인 이양직은 이곡(고려 문관 이색의 아버지)의 친구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타인의 입을 빌어 이렇게 후대에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작가는 실제 그녀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의문을 던진다. 우선 어머니와 외가 이야기가 없다. 시어머니 이야기도 없다. 손자에 대한 설명도 없다. 그녀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여성들의 이야기는 단체로 소거되었다. 아무리 스스로 돈을 벌어 생계를 꾸려 갔다고 해도 당시 환경에서 그녀가 홀로 살아나갈 수 있었을까. 외가나 자매 등의 보호가 있지 않았다면 어려웠을테니 말이다. "만약 조씨의 일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게만 된다면, 대서특필하여 기록으로 성대히 전해짐은 물론이요, 주려州閭에 정표하여 광채를 발하게 할 것이니, 어찌 끝내 이름이 파묻혀 없어지게 하겠는가." 조씨 부인 이야기는 아버지, 남편, 시아버지를 모두 잃은 여인이 개가하지 않음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절부 이야기도 있더라를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지적인데 타당한 말이다.
1671년에 태어나 89세를 살았던 함흥 기생 가련은 긴 생애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녀는 한글을 잘 알고 쓰고 한문도 조금 알았지만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남기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를 만난 사람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조선의 양반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이건창이 쓴 <가련전>에는 그녀의 생애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련은 한양의 명문가 출신인 목생이 함흥에 있을 때 인연을 맺어 사랑을 한다. 덕분에 그녀는 숙종 당시 조정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데 목생이 남인이었기에 그와 관련한 정치색을 가지게 되었다. 목생은 한양으로 돌아갔으나 입소문을 탄 그녀의 행보를 안 남인 관료들이 너도 나도 찾아왔다고 한다. 노론을 비판하며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정권을 잃으면서 힘을 잃었다고. 소설이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다.
가련은 함흥에 유람을 온 권섭이 머무는 동안 가까이 지내며 찐한 연애를 했다. 그렇지만 육체적인 관계만 그친 것은 아니고 권섭이 지은 글이나 시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원고 청탁을 하기도 했다고. 당시로서는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는 학구열이 남달랐던 것 같다. 특히 권섭이 노론 출신이었음에도 자신의 남인 정치색을 굽히지 않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권섭 뿐만 아니라 함흥으로 찾아오는 문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한시 등의 글을 수집, 청탁한 글들을 모아 <가련첩>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는 평생을 이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공부하면서 살다 죽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 함흥 대표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가련은 한편으로는 '명예 남인'을 자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양반 남성이 주도한 정치 논리의 '성실한 학습자/체현자'에 그치지 않았다. 가련은 사랑할 만한 남자를 알아 보고 열성적으로 사랑하면서도, 그 남자를 통해 기생에서 벗어나 신분 상승하는 길을 도모하지 않았다. ... 존재 증명과 인정 욕구야말로 그녀의 생애를 관통했던 화두였다. 이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은 천민 신분인 조선시대 기생의 처지에서는 지극히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가련은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결국에는 성취해 냈다.
이동과 통신이 제한적인 시대일수록 기록자를 경유한 구전 지식의 전달 가능성을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근대 여성 대부분이 직접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고 하여, 그들의 목소리 찾기를 섣부르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