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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
  • 미할 비란 외 엮음
  • 42,300원 (10%2,350)
  • 2026-04-30
  • : 130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는 오래도록 몽골사에 몸담은 권위 있는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최근 학계의 내용과 의견을 담은 만큼 몽골 제국사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제1권은 주제별 내용 중 앞부분에 해당하는 정치사로 몽골 제국의 왕조사를 정리해놓았다. 구체적으로는 칭기스칸이 부족을 통일한 이후의 제국에서 4개의 칸국이 성립하고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몽골사를 다시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읽게 될 줄 몰랐는데 어쩌다보니 펀딩에 참여하였고 기간 내 읽어주는 게 마땅하다 여겼다. 적절한 타이밍에 연휴 기간이 있어서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 이전에도 유라시아 역사에 요, 금 등의 유목 제국이 있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이룬 성과는 지리적으로도 앞선 국가를 앞설 뿐 아니라 향후 제국의 역사에 기반이 되는 제도와 장치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몽골의 시대는 과거의 종말이자 새로운 세계의 탄생으로 여겨졌으며, 최근에는 세계화를 향한 도약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P167). 


몽골은 유목민의 사냥, 전쟁, 사회 조직 기술을 제국 시스템에 통합하였다. 칭기스, 우구데이, 구육은 초기 제국 내 규범을 구축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칭기스칸은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일한 뒤 1206년 몽골 제국을 선포하고, 십진법 기반의 군대 조직과 천호제, 황실 친위대(케식) 등을 도입하며 국가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서하(탕구트)를 복속시키고 금 원정, 중앙아시아 호레즘 정벌 등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칭기스칸은 죽기 전 네 아들에게 땅을 분배했다. 주치에게는 호레즘에서 카스피해 북쪽과 서쪽의 킵착초원을 부여했고, 차가다이에게는 위구르와 트란스옥시아나를 주었다. 우구데이에게는 몽골의 고향 땅을, 톨루이에게는 우구데이 영토에 인접한 중앙 지역을 주었다. 우구데이 카안은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행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뭉케 칸은 제국 전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분할된 통치 체제를 재조정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


카안(대칸)이라는 칭호는 칭기스가 죽은 이후, 아마도 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1264년경에 수여됐을 것이다. 알타이 민족들은 백색과 9라는 숫자를 길한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흰 깃발인 툭(tuq)은 초원 민족들에 대한 칸의 독점적 주권의 상징이 됐다. 1211년 이전부터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대몽골국(大蒙古國, YekeMongol Ulus), 즉 몽골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금의 중국식 명칭인 대금국(大金國)을 모델로 삼은 것이며, 한문 사료에는 대몽골국 또는 대조(大朝)로 기록됐다. 몽골의 집회에서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잔치를 베풀고 상을 배분하면서, 이들은 제국 설립과 새로운 지배 엘리트의 추대를 위한 기반을 명문화하고 신성화했다. 몽골 사회의 무법과 폭력을 질서와 규율로 대체하려는 욕구는 곧 칸의 제도 개혁의 추진력이 됐다. 여기에는 초원 민족을 재편성하기 위해 칭기스 칸의 추종자들, 특히 영웅적인 행적을 보인 인물과 눈에 띄는 충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례도 포함됐다. - P52~53

몽골이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고 그에 따라 많은 비유목 민족들과 땅들을 흡수하면서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생했다. 칭기스칸이 고향을 떠나 진군했을 때의 원래 목적(복수와 약탈)은 변화했다. 정복은 이제 신성한 사명이 됐다. 유라시아 초원은 점차 온전한 통일을 향해 가고 있었으며, 이는 우구데이에 의해 완성됐다. 이로 인해 초원 주변의 정주 문명들은 칭기스의 후계자들이 계속 확장해나가는 제국에 저항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그 일부로 편입될수밖에 없었다. - P95


앞선 통일 제국 시기(1206~1260년)를 지나고 이제 후계자들에 의한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먼저 대원 울루스(1260~1368년)로 이곳은 우리에게 원나라로 익숙하다. 뭉케에 이어 아릭부케와의 승계 전쟁에서 이기고 집권한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으로 정하고 대도(베이징)로 수도를 옮겼다. 그는 몽골의 공식 언어인 ‘팍바문자’를 도입(공식 문서 등 대외용 문자)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남송 정복을 시작으로 일본, 베트남, 참파, 버마, 자바까지 진출했다. 원은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한 뒤 대내외 활동으로 화폐 양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14세기 무렵이 되면 계속되는 해외 원정으로 국가 재정이 적자에 빠진다. 이후 제국은 기근, 역병이 들어 도적과 무장 집단이 증가하였고 지역 군벌들이 힘을 키우며 자연스레 제국 중앙의 힘은 빠지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집권 말기에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의 남중국 정복은 카안의 울루스에 몽골 세계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부여했다. 이는 제국의 원래 중심지인 몽골과 멀리 떨어진 해외 조공국들을 모두 아우르는 권위였다. 또한 이 정복은 몽골 통치자들에게 해양세계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었고, 몽골 시대의 유명한 문화 교류를 활성화한 제도들의 정점이 됐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톨루이 계열통치자들은 이 전례 없는 해상 연결을 통해 중동과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어냈고, 이는 청에서 오스만튀르크에 이르는 후대 유라시아 정권들에 영향을 미쳤다. - P294


뭉케는 훌레구에게 지금의 이란 지역의 총독을 맡겼다. 훌레구의 임명은 훌레구 울루스(1260~1335년)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훌레구 울루스는 일 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 칸’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이는 ‘칸’이 아니라 ‘일’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일’은 종속의 표시로 훌레구의 지위가 형 뭉케와 쿠빌라이에 비해서 낮음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지만 훌레구 울루스는 화폐에 ‘일 칸’이라는 용어를 왕조 초기부터 꾸준히 사용하였다. 아무튼 훌레구가 세운 이 왕조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중심으로 서남아시아에 영향력을 미쳤다. 가잔 칸은 과세 방식 개선, 도량형 표준화 등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아부사이드 치하에서 왕조는 이슬람 문화를 기반으로 번영했으나 후손이 끊기며 막을 내렸다. 보시다시피 훌레구 울루스는 다른 울루스에 비해 그 역사적 기간이 짧다. 우선 훌레구 울루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란과 중앙아시아 사이의 국경이 불안정했다. 차가다이 세력은 주기적으로 습격하였고 주치 가문 역시 울루스 북부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또 이집트의 맘룩 왕국은 주치 가문과 상호 의존 동맹을 맺으며 위협에 힘을 보탰으니 훌레구 울루스는 오래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훌레구 울루스는 이슬람 신학과 철학을 넘어서, 동방 이슬람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표현이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P389)는 의의를 가진다. 


금장 호르드에 소속된 민족들은 주치의 이름을 따라서 주치 울루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주치는 처음에 서몽골과 시베리아 삼림 지역을 기반으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호레즘의 오아시스와 서부 초원을 받은 데 이어 정복 활동으로 러시아의 여러 공국, 크림반도, 볼가-우랄 지역, 북캅카스까지 몽골 지배 하에 두게 되었다. 금장 호르드(주치 울루스: 1260~1502년)는 이슬람교를 수용하여 중앙아시아, 동유럽, 러시아에 이를 확산시켰다. 바투의 동생 베르케 때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이후 금장 호르드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술탄이라 부르며 주화에 새겼다(물론 칸이라는 용어도 썼다). 또한 지배층은 무슬림의 다양한 행정 인력을 등용하여 실용적이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동슬라브 지역에 있던 공후들은 칸들과 혼인 동맹을 맺고 군사 지원과 면세 혜택을 받으면서 점차 부상했다. 이는 특히 모스크바 공국의 출현을 이끌어냈다. 우즈벡 칸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했으나, 이후 흑사병의 유행과 내부 갈등, 티무르의 견제 등으로 쇠퇴했다. 이후 여러 칸국으로 분열되었으며, 훗날 모스크바 공국이 금장 호르드의 영향력을 대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후계국 중 하나인 차가다이 울루스다. 안타깝게도 기록이 가장 적고 연구도 미비하다고 한다. 나도 차가다이 울루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차가다이 울루스는 여러 국가 사이에 끼어 있었던데다 잦은 전쟁과 인재 유출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미비했던 이곳이 몽골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티무르 제국과 인도 무굴 제국의 발원지가 되었다. 차가다이 울루스는 델리 술탄국이나 맘룩 왕국 같은 나라들, 교황청과도 관계를 맺었다. 뭉케 사후 차가다이 울루스는 톨루이 가문과 계속해서 갈등했다. 그렇지만 차가다이 가문은 권력을 계속 이어가 17세기 후반까지 모굴리스탄을 통치했고 그의 후손들은 20세기 초까지 신장에서 권력을 유지했다.

몽골 중앙아시아는 ‘몽골의 시대’라고 불리는 번성했던 경제적, 문화적 교류에 참여했으며, 중심지라는 위치에 비해 두각을 드러낸 것은 아닐지언정 그 일원이었다. 강력한 칭기스 칸 계통의 정체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중국과 이란에 견줄 만한 정주 기반이 부족했던, 경쟁하는 두 울루스의 본거지인 중앙 몽골 울루스는 몽골 정체들 중에서 패배자로 간주되었다. 이는 중국, 이란, 러시아와 달리, 우구데이와 차가다이의 영역을 물려받은 현대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몽골 중앙아시아는 단순히 지속했다는 사실 이상으로 몽골과 세계 역사에 그 흔적을 남겼다. - P640 


한반도의 고려 역사와도 관련 있는 대원 울루스는 익숙하지만 이 책으로 더 세밀히 알게 된 부분도 있어 소득이 있었다. 훌레구 울루스와 금장 호르드는 지리적으로 멀고 문화적으로 멀어서 늘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것 같아서 좋다. 차가다이(중앙 몽골) 울루스는 상대적으로 몽골사에서 비중이 낮게 부여되었던 부분이었는데 그 영항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정치사라고 하기에는 실제를 다 담지 못하는 것 같다. 정치 뿐 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 등의 분야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근까지의 역사 동향을 알려준 것이 좋았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 그리고 저자의 의견, 반론 등을 실어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눈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의 폭력성에 주목했던 경우도 있었다면 팍스 몽골리카에 주목하며 경제적, 문화, 종교적 영향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한쪽에만 쏠려 있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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