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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당과 국가의 갈등을 매우 흥미롭게 묘사한 한 가지 사례는 망명 학자인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이 나치 독일을 ‘이중 국가(dual state)‘라고 표현한 :이었다. 프랭켈은 히틀러 정권 때에는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부 당국과 기존의 관료조직으로 구성된 ‘표준 국가(normative state)‘가
‘당의 ‘동형 기구‘로 만들어진 ‘특권 국가(prerogative state)‘와 권력- P277
11)다툼을 벌였다고 썼다.
프랭켈의 나치 통치 분석 모델에 따르면, 파시즘 정권의 ‘표준적‘ 영역은 계속해서 정당한 절차에 따라 법을 집행했으며 관리의임명이나 승진 기준도 능력과 근속년수라는 관료주의적 기준을 따랐다. 반면, ‘특권적‘ 영역에서는 지배자의 변덕이나 당 활동가들에 대한 보상 혹은 ‘선택된 민족(Volk, razza)‘에게 예정되어 있다고가정된 ‘운명‘ 외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표준 국가‘와 ‘특권국가‘는 갈등을 빚으면서도 어느 정도 손발이 맞는 협력 속에서 공존하였으며, 그 결과 정권은 관료주의적 형식주의와 독단적인 폭력이 혼합된 기묘한 형태를 띠었다.- P278
파시즘 정권 안에서 끝없이 계속된 권력 투쟁에서, 당이 초기에- P283
세력을 키우느라 만들었던 동형 조직들은 복합적이면서도 모호한역할을 했다. 이 조직들은 전면 공격 대신 측면에서 보수파의 허를찌르려고 했던 파시즘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동형 조직들은 야심만만한 당 급진파들이 지도자의자리에 도전하는 데 필요한 자율적 권력 기반이 되기도 했다.- P284
‘홀로 통치하는 전능한 지도자‘ 라는 극단적 의도주의 시각과, 아래로부터의 추진력이 역동적 파시즘의 주요 동력이라고 보는 극단적 구조주의 시각 중 어느 쪽도 완전히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1990년대에 신빙성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두 시각을 포괄하는 설명이확립된 뒤에야 비로소 지도자의 은밀한 소망을 미리 예측해서 그소망을 향해 ‘내달리는‘ 중간층 지도부 내부의 경쟁이 합당한 위치를 부여받은 동시에, 목표를 설정하거나 한계를 제거하고 열성적인측근들에게 상을 주는 지도자의 역할이 불가결한 요소로 인정받게되었다.- P292
나치 의학이 희생자에게 끔찍한 고통을 야기하기는 했으나 단순한 잔학성의 발로로만보기는 어렵다. 나치 의학은 광범위한 기초 공공보건 연구를 출범시켰다. 예를 들어, 독일 과학자들은 세계 최초로 담배와 석면의 발가능성을 의심했다. ‘인종‘ 개선은 또한 대가족 장려를 뜻했고, 파시즘 정권들은 출산 장려 정책을 펴기 위해 특히 인구통계학발달을 뒷받침했다. … 나치 행정관들은 슬라브인의 마구잡이식 유대인 학살과는 달리 자기들이 이 문제를 조직적이고 과학적으로 처리한다고 자랑스러워했으며, 의사- P305
나 공공보건 담당 관리들에게 다양한 권한을 부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의학적 살인‘ 에 가담했다.- P306
인기 아니면 공포라는 이분법은 지나치게 경직된 측면이 있다.
나치즘조차도 야만적인 폭력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최근 연구의 한 가지 특기할 만한 발견은 나치 정권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 필요한 경찰 기구의 규모가 매우 작았다는 사실이었다. 열성적인- 혹은 시기심 많은시민들로부터 들어오는 고발이 워낙 철저했기 때문에 게슈타포 조직은 시민 10,000~15,000명당 경찰을 한 명만 배치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전후(戰後)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국가공안부 슈타지(STASI)에 비해 배치 비율이 훨씬낮은 셈이었다.- P309
원자화를 나치의 성공 필수요건 중 하나로 파악했다는 점에서아렌트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아렌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은 역사적 관점에서 저술되기는 했으나, 기원과 역사를 논한다기보다는 극단적인 급진화에•대한 철학적 고찰을 담은 책으로 보아야 한다. 사회의 파편화 및 원자화가 파시즘이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는 미흡할지 몰라도, 통치의 파편화 및 원자화는 파시즘의 마지막 단계인 급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P358
1939년 9월에서 1944년 말 사이 폴란드와 소련 내 나치점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유대인 처리가 거의 전적으로 나치행정관들의 개인적 재량에 달려 있었으며 지역적 편차도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치안 문제, 물자 부족, 토지 부족,
•만연하는 질병 등 상상도 못할 만큼 심각한 문제들을 알아서 해결- P363
해야 할 처지가 된 그들은 현지에서 온갖 종류의 해결책을 실험해보았다. 게토(ghetto, 유대인 강제 거주 지구)를 만들어 수용하거나강제노동을 시키기도 하고 재정주 정책을 사용해보기도 했다.) 새로 장악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폴란드 동부에서 일부 나치 행정관들은 ‘보안상의 이유로 유대인 남성들을죽이는 선을 넘어,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유대인 인구 집단 전체를학살하기 시작했다. 1941년 8~9월경부터 시작된 학살은 현지 행정관들의 자체 결정에 따른 처사였음이 분명하다(물론 베를린 중앙정부에서 승인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P364
나치 친위대는 표준 국가가 거의 역할을 수행하지못했던 점령지에 독자적인 군사. 경제 제국을 세웠다.)이 주인없는 땅에서 관료적 규칙이나 도덕적 원칙은 쉽게 밀려나고, 지배인종의 요구만이 유일한 행동 기준이 되었다.- P371
파시즘은 타고난 성격 자체가 불안정하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보면 파시즘은 겁에 질린 보수파나 자유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최종 결론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정권들이 점점 무모하게 성공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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