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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에게 드리는 글>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주시오.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사자주 이야기를 하여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은 때맞춰 하도록 하여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하게 하여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주시오.- P124
3·1운동 시기 지하 신문은 대안언론의 역할을 했다. 사설을 통해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렸고, 기사를 통해 국내외의 3.1운동 소식을 알- P135
리고 이를 왜곡하는 <매일신보》를 규탄했다. 또 국내외의 임시정부 수립소식을 알려 만세시위 확산을 북돋웠다. 지하 신문 발간 운동은 곧 언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또한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언론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일본 내의 목소리조차 무시해온 조선총독부에대한 일대 가격이었다.- P136
1924년 6월 20일에 열린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는 언론인 최초의 언론 자유 투쟁이었다. 그해 4월 2일 박춘금을 비롯한 각파유지연맹원들- P141
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이사 김성수를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각파유지연맹은 1924년 3월 25일에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12개 친일단체가 모여 결성한 연합체였다. 각파유지연맹은 창립총회에서 독립사상과 사회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총독부를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3월 30일자와 4월 2일자 사설은 각파유지연맹 결성 과정을 밝히고, 각파유지연맹이 ‘총독정치의 선전기관이며 이를 좇는 자들의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각파유지연맹이 송진우와 김성수를 협박했던 것이다. 각파유지연맹원들은 두 사람에게 <동아일보> 사설과 같은 주장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송진우는 사담(私談)이라는 문구를 넣어 각서를 썼고,
김성수는 개인 돈 3000원을 주기로 하고 위기를 모면했다.- P142
낮고 가난하고 뒤떨어지고약하고 천하고 굽실대는 자는 누구였던가? 아아, 우리 백정이 아닌가? 그런데 이와 같은 비극에 대하여 사회의 태도는 어떠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압박과 멸시만을 하였도다. 이 사회에서 우리의 연혁을 아는가? 모르는가? 결코천대를 받을 우리가 아니다. 직업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짐승의 생명을 뺏는자 우리 백정뿐만이 아닌가 하노라. 본사는 시대의 요구보다도 사회적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2000만의 1인이라.- P151
조선총독부는1932년 말부터 ‘백정의 해방은 형평운동보다 계급운동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형평사 해소를 조종하는 동시에 적화운동을 위한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100여 명의 급진파를 검거했다. 형평청년 전위동맹사건이 그것이다. 급진파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온건파였다. 이제 형평사는 온건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리고 형평사는 1935년친일융화를 표방하는 대동회로 개편되었다. 스스로 생존권을 찾아나서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결국 식민권력에 포섭된 것이다.- P159
일찍이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시에 내가 설립에 관한 용무로 도쿄에 갔을때 구보다(保) 추밀원 고문관에게 호출되어 대학 설립에 관한 여러 가지이야기를 나누었던 바, 그는 조선에는 법과대학이 필요 없지 않은가? 오히려그보다는 농과대학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는 민립대학 설치 운동이 꽤 맹렬하여 기부금 모집을 시작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선교사들도 사립대학 설립의 계획이 있었으며이들 대학은 주로 법률·정치·경제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관계상 이때만약 관립의 법과대학을 세우지 않으면 조선에서 법률·정치·경제 등의 최고교육은 이들 사학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시 민족운동을 볼 때 이는심히 위험시되는 것이라고 답변하여 이해를 얻었던 일도 있다.-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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