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에는 전국 13도에서 280여 개 학교가 참여했다. 참가 학생은 연인원 5만 4000명에 달했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학생은 8만9000명이었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은1642명이었다. 시위 주동자 혹은 가담자로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은 2330명에 달했다. 1929년 12월에는 일본에서,
1930년 1월부터는 중국 관내와 만주, 연해주, 미국 등지에서 한인 사회가 나서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집회를 열었다. 203·1운동으로 첫 등장한 학생세력은 6.10 만세운동에 이어 전국적인학생시위로 발전한 광주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시기에 일어난 대규모 대중시위의 선봉대였다. 맹휴를 통해 다진 결속감을 바탕으로 한대중 동원은 압도적이었다.- P83
원산노동연합회는 결성 직후부터 1927년까지 3년 동안 26건의 파업- P92
을 주도하여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미리 자금을 모아 파업기금을 준비했고 소비조합과 노동병원, 노동자 이발부를 설치하여 노동자들에게 물질적 이익을 제공했다. 산하 조합마다 구제부를 두어회원 노동자들의 상호부조 활동에 힘썼으며, 회원이 사고를 당해 작업을못하거나 병에 걸리는 경우 생활비를 지원했다. 그러므로 원산의 노동자들은 다투어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조합에 가입하려고 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이러한 강력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실질적인 단체교섭을 확보함으로써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아가 원산노동연합회가 주체가 되어 지역 내 모든 화주들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시도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 화주들에게 노임표 조회를 요구했다.-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