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거리의화가의 서재
  • 양면의 조개껍데기
  • 김초엽
  • 15,750원 (10%870)
  • 2025-08-27
  • : 80,480

상대에게 이야기를 건네기, 살아 있다는 감각을 놓치지 않기, 나 중심 사고 돌아보기 등등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이다. 김초엽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럴싸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상상으로 빚어낸 이야기로 놀라움을 주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래서 좋았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SF적 상상으로 풀어내 독자에게 질문함으로써 각자의 생활 속에서 고민 속에 얻은 해답을 현명하게 풀어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단편 소설이라 시간이 날 때마다 한 편씩 읽었다. 대부분이 좋았는데 아래는 특히 내게 와닿았던 소설이었다.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는 흥미로운 소재에 박진감 있는 전개로 순식간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책의 포문을 열기에 적절했다 생각한다. 

'인간의 살갗인 이 부드럽고 연약한 피부가 다른 물성으로 된 것이었다면?' 이 소설은 그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진다.

금속 피부를 이식한 수브다니를 보면서 나는 단순하지만 어릴 적 만화에서 본 기계 인간을 떠올렸다. 영원한 생명을 꿈꾸던 인간이 기계의 몸을 주는 행성에 가 기계 인간이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영원의 삶을 살 수 있던들 무슨 소용일까, 유한한 생명이어서 값진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어린 나이에도 했었더랬다.  

어쨌든 나는 수브다니가 금속 피부를 이식한 이유가 너무 의외라서 놀랐다. 금속 피부를 애써 고집하는 그를 보면서 주문을 받은 이는 그의 내막을 궁금해하고 이후 수브다니의 개인적 사정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의외의 전개로 흘러간다.

과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외형을 바꿀 수 있다면 삶의 어떤 것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따라올까? 인공 장기, 인공 피부... 여전히 윤리적 문제는 남아 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수브다니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여름 휴가를 떠났고 자신이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내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가 상대에겐 낯선 것일 수 있다.   


<양면의 조개껍데기>는 과연 표제작다운 소설이었다. '여러 명의 자아를 가질 수 있다면?' 실제로 그런 이들이 있었다. 

여러 명의 자아가 갈등하고 충돌하여 분열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결국 다 쪼개져 분리되어 버린다면?

나는 평소 내 안의 자아도 여러 명이 살고 있나 생각할 때가 있다. 자아를 과연 단일한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해서다.

종종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혹은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반감이 든다. '내가 가진 본 모습이라는 게 어떤 거지?' '나다운 게 뭘까?'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규정하고 싶어하고 그래야 복잡하지 않고 정리하기 편하니까 그렇게 묻는 걸까 할 때가 있다.

어쨌든 내 안에 여러 자아가 있다는 가정은 실제 분리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가정이라 흥미로웠던 것 같다. 과연 주인공은 여러 명의 자아와 화해하여 좋은 결말을 맺었을까?

더불어 나, 인간, 지구 중심의 사고에 우리가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곱씹게 하는 부분도 있어서 좋았다.


<진동새와 손편지>는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는 재미 면에서는 덜하다. 그렇지만 지구인의 문자 기록 역사와 언어 소통 문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지구인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자 기록과 언어 소통이 비지구인에게는 낯설 테니까 말이다. 

과거부터 인간은 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는 것에 집착하며 기록에 집착했을까. 진동새는 촉각으로 질감과 진동으로 정보를 얻는다고 한 것처럼 감각으로도 의사 소통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사실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것이 다양성 면에서는 좋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번거롭고 복잡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물론 다양한 언어를 배우는 재미가 있고 외국어 소통을 위해 통역사라는 직업도 존재할 수 있었지만. 기록 문화는 확실히 매력이자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것이 기록화되어 오늘날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미래에도 전수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달고 미지근한 슬픔>은 살아 있는 감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그 감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나온다. 데이터 조각이 되버린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하는 일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감각한다는 것이 소용 없는 일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어져 있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남았다. 예전보다 그 고립감과 공허함은 더욱 커지지 않았나 해서다. 이제는 예전보다 더 쉽게 연락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화번호를 누르는 일이 더 어렵게 되어버린 것 같다. 


<비구름을 따라서>는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과 조금씩 얽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다면?' 사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려면 상상했을 때 무언가 떠올라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다. 이 세계가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적응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서이겠지.

아무튼 여기에는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 다른 세계에만 관심 있는 사람(이 세계를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세계에 어떻게든 발붙어 사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이 다쳐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별 수 있나, 살아야지. 그치만 그게 안될 만큼 힘겨운 사람도 분명 있다. 주인공은 하나의 일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옮겨다닌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작가가 쓸모가 있어야만 하는 이 세계를 비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비구름을 따라가자는 마지막 말이 남았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