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그렇게 1894년의 격변을 거치며 조선 사회는 확연히 변했다. 인민들은 칼 대신에 펜을 들고 자발적 결사체를만들어 여론을 형성하며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거리 풍경도 변했다.
문명화의 세례로 도시는 서양의 모습을 띠어갔다. 잘 닦은 도로에 높은 시계탑이 걸린 서양식 건물이 하나씩 올라가고 정해진 시각에 달리는 전차와 전신주를 갖춘 도시는 인민에게 변화를 실감하고 희망을 꿈꾸게 하는강력한 자극제였다. 이제 더는 거스를 수 없는 개혁의 요구와 운동은 이렇게 새로이 펼쳐진 인민의 공간, 도시에서 자발적 결사체와 시위와 집회를통해 활짝 피어났다.- P222
<협성회규칙>에 따르면 토론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회장이 토론 주제를 발표하면 토론이 시작된다. 찬성 2명, 반대 2명으로 편을 나누어,
찬성과 반대 측 대표가 각각 10분씩 연설한다. 그런 다음 찬성과 반대측에서 상대 주장을 5분 동안 반박한다. 청중 가운데 지명받은 사람 몇명이 3분씩 질문하거나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찬성과 반대 측 대표가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한다. 회장은 청중에게 토론회의 승패를 물어 결과를 발표한다. 승패가 갈린 후 초청 인사의 연설을 듣고 토론회를 마친다. 토론 주제는 2주 전에 결정하고 일주일 전에 회보에 실어 회원 모두가 사전에 알고 토론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 토론회 방식은, 서재필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토론 및 연설 조직인 레노니아클럽에 참가해서 익힌 영국 의회 토론 방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협성회 토론회는 모두 50회나 실시되었다. 토론 주제는 자주독립과•자주외교(7회, 14퍼센트), 자유권·평등권 · 참정권 등의 기본권 (14회, 28퍼센트), 국정 개혁과 문명 계몽(29회, 58퍼센트) 등이었다.- P247
1900년대에 들어와서야 개인은 인민, 국민, 동포 등 집단과 구별되는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나진과 김상연이 번역하고 해설한 《국가학》은 개인을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로 설명했다. "국가는 개인 혼자의 힘과 또사회적 통합력에 의지하여 경영하고 존립하는 하나의 커다란 공공체"
라고 했다. <대한매일신보》에도 ‘일개인‘ 혹은 ‘개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국가는 국가의 사업에 정진하고 개인은 개인의 사업에 정진하라." 지금은 당연한 주장 같지만, 당시만 해도 개인과 국가를 대등한 위상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새로운 변화였다. 개인의 활동과 영역이이미 하나의 권리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나라가 썩고 망해가는 이유로 개인주의의 유행을 들면서 개인주의를 경계했다. 개인주의가 애국심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P282
빈부귀천 따로 없이 누구든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이를 ‘자주노동‘이라 한다. 자주노동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는곧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조선 정부는 그것을 ‘유랑‘이라 표현하며 위험시했지만 권력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었다. 19세기초가 되면 서울에도 상인, 수공업자, 일용노동자, 잡역부, 부랑자 등이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들은 도시의 문명화와 함께 새로운 직업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P285
1804년에 나온 중국어판 <만국공법>(원저자 헨리 휘튼(Henry Wheaton), 한역자 윌리엄 마틴(William Martin))은 영어 ‘right‘를 ‘권리‘로 번역했다. 이책은 국제법상 국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런데 ‘권리‘라는 개념이 ‘개인의 권리‘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혼선이 생겨났다. 유학에서 권리는 자유가 그랬듯이 결코 긍정적인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이기적‘이라는 뜻을 내포했듯이, 권리는 ‘이기적인 이익 추구‘를 가리키는개념이었다.- P294
국가는왕과 정부와 인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생존과 국가의 운영에 필요한 재정과 물품을 생산하는 존재는 임금이나정부가 아니다.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인민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의 ‘권리‘로 국가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인민이 자신에게 이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국가가 안녕할 것이라는 점이 ‘민권론‘의 핵심 주장이었다.- P311
유길준은 중립화의 절차로 청이 주도하여 러시아,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조선과 아시아에 관심이 있는 나라들이 모여 조약을 맺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렇듯 유길준은 청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탈중국자주독립의 길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인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힘이 부족하니 조선을 둘러싼 주변 국가와 서양 열강의 양해를 얻어 중립국으로 살아가자고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독립국으로서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P335
‘정신상 국가‘를 이끄는 주체가 민족이었다. <독립신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민족이라는 개념은, 현존하는 국가의 구성원 혹은 국가가 없더라도 존재하는 국가의 원형적 집단을 의미했다. 나라를 잃으면서 후자. 즉 국가의 원형적 집단으로서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초역사적인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1908년부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라는 말이 관습적 표현이 되었다.
민족 개념을 발판으로 민족주의와 민족국가론이 등장했다. 민족주의는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저항 논리로 제시되었다.- P342
공화라는 개념은 1881년에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민종묵의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민종묵은 세계 각국의 정체로 국민공치, 입군(君)독재, 귀족정치와 함께 공화정치를 소개했다. 1883년에는 홍영식이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고종은 홍영식에게 미국의 정치제도를 물었다. 홍영식은 미국이 삼권분립을 실시하고 있으며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P363
3·1운동에서 민족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적 논리는 민주주의였다.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것은 민족의 정당한 권리이므로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민족의 독립이 곧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구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에 전 민족 구성원, 즉 인민들이동조했다는 것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동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