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해방의 논리는 명확했다. 평등권은 하늘이 준 권리이므로 누구에게도 사람을 사고팔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노비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노비를 풀어주어야 상전도 노비제라는 신분적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설득했다." 노비를 천부인권을 가진 인민으로 품어야 진정한 신분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례도 제시되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것은 노예 해방, 신분 해방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인도는 신분제가 잔존하여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독립협회는 노비제 잔재 청산 운동을 통해, 어떤 개인이든 똑같이 인민으로 대접받을 때 진정한 신분 해방이 이루어진다는 논리를 신문이나 토론회 등을 통해 널리 확산시켜나갔다.- P30
교우촌에 모여 사는 천주교인에게 무엇보다 절박한 문제는 생계였다.
화전을 일구기도 했지만, 교우촌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것은 옹기를만들어 파는 일이었다. 종교 탄압을 피해 신앙생활을 계속하며 먹고사는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옹기 장사를 하면서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헤어진 가족과 연락하고 천주교 소식을 듣거나 전할 수있어 좋았다. 옹기 교우촌이 주로 지역 간의 경계 지점에 형성된 것은 도주에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옹기업은 특별한 시설이나 도구, 많은 자본이 없이도 기술, 연료, 흙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옹기를 만들고 파는 데는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 교우촌의 천주교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일을 했다.
옹기 교우촌은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자치적삶의 실천장이었다.- P78
최시형이 1884년에 생활 규범으로 내놓은 <통유문(通文)>은 전통적인 일상 윤리에, <십무천(+天天)>은 동학의 평등적 사유에 기반하고있다.
<통유문>에서는 전통적 일상 윤리의 화법을 빌려 동학이 제시한 도덕을 요구하고 있고, <십무천>에서는 하느님, 즉 모든 인간을 대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 둘을 조화시킨 생활 도덕 운동을 전개한 동학에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것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는 전환의 시대에 동학이 인민에게 호소력을 가진 소통의 종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P89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전파하던 와인 1862년에 삼남지방에서 농민항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후 개항이 되었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일어났다. <한성순보》가 서양 민주주의를 소개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를 세웠다. 이 모든 것을 인민은 감지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항쟁했으나, 이제껏 역사가들은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오로지 중세로부터의탈피, 즉 반봉건 농민항쟁 안에만 가두었다. 신분을 뛰어넘어 세금을 공평하게 부담하고 관리의 부정부패가 없는 정의로운 사회와 나라를 염원하고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나선 인민의 역량을 과소평가해온 것이다.- P111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는 <혁신정강>을 발표하면서 불공정한 조세제도의 개혁과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을 4개 조항에 걸쳐 제시했다.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전국의 간사한 관리를 없애고 어려운 인민을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히 한다.
•국가에 해독을 끼친 탐관오리 중 가장 심한 자를 처벌한다.
• 각도의 환곡을 영구히 면제한다.
• 모든 국가 재정을 호조가 관할하도록 하고 그 밖의 재무관청을 폐지한다.
급진개화파의 주장을 살피면서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만약 성공했더라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P141
동학은 과거 잘못된 세상을 고쳐 다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선 것이다.
인민에 해독을 끼치는 탐관오리를 베고 일반 인민이 평등하게 대우받도록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복을 채우고 음탕하고 삿된 일에 소비하는 국세와 공금을 거두어 의거에 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우려 행악을 하고 여러 사람의 피땀을 긁어 제 몸을 살찌우는 자를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고 귀천이 있게하고 공적 토지를 사사로운 토지로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상원리에 위반이다. 이것을 고치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며, 악한 정부를 고쳐 선한- P155
정부를 만들고자 함이 무엇이 잘못이냐?- P156
지금까지는 개화파의 문명화 정책을 친일, 친청, 친미, 즉 외세 의존적이라는 민족주의적 시각에 초점을 맞추거나 반민중적이라고 평가하는의견이 많았다. 개화파는 1862년 농민항쟁을 목도하고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내놓은 개혁안인 <혁신정강>에 인민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했으며, 민씨 척족에 맞선 권력 내의 소수자, 즉 비주류였다. 10년의 핍박 끝에 1894년에는 동학농민군의 요구를 수용하며 갑오개혁을 실시했다. 권력의 바깥에서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만들어 인민에게다가갔다. 이처럼 개화파는 권력 안팎에서 ‘인민파‘로 활약했으나, 그들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인색하기만 하다. 민주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인민과 권력 내 ‘인민파‘, 즉 개화파는 독립협회가 생겨날 무렵부터 소통하고 연대하며 전환의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으나, 정작 고종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부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