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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야만의 해변에서
  • 캐럴라인 도즈 페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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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8
  • : 1,550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우리 자신을 부르는 것이며, 사람들이 우리를 언급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였는지를 나타내는 것이자 상대방이 그와 나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P17


나의 이름은 사라지고 무언가가 되거나 집단화되어 통칭된다면 어떨까.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또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구나.’하고 여기지 않을까. 과거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로 불리지 않았으며 지워진 채 이용 당하는 세월이 길었다. 상대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일부터 시작이다. 이 책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수많은 유럽인들이 기독교 선교를 위해(명목으로) 아메리카 땅에 건너갔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개종시키면서 원래의 문화는 사라지거나 동화되었고 집단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원래 살던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토착민’? 이제는 ’인디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조심스러워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원주민’도 그렇다. 어릴 때는 ‘식인종’이라는 말도 사용됐다. 어쨌든 저자는 앞선 단어 대신 인종적, 국가적 의미를 최대한 제거한 중립적인 용어인 ‘인디저너스’라는 단어를 쓰자고 말한다.  


대항해 시대 아메리카라는 공간은 익숙하지만 대부분 유럽에서 아메리카라는 방향으로 일관되어 있었던 것 같다. 출발점은 늘 유럽과 서구였고 그곳이 문명이었다. 인디저너스들은 사물화되거나 노예화되어 유럽인들에게 흥밋거리나 유용한 도구쯤으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야기한다면 무시하거나 배제되었던 그들의 삶과 문화는 찾을 길이 더 희박해질 것이다. 그들은 결코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체념하듯 상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자신만의 무기와 기술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인디저너스들은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부를 얻은 경우도 있었다. 유럽에서 여러 대를 걸쳐 살면서 가문을 일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가족이 모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구성원 중 일부는 스스로 거부하거나 부득이한 경우로 내쫓겨 아메리카로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15세기경 노예는 삶의 일부였고, 이슬람 지역, 동유럽, 아프리카, 카나리아 제도 출신 사람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노에 시장에서 일상적으로 거래되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는 인디오들의 수호자였음에도 인디저너스 수를 줄이기 위해서 아프리카 해안 지역 출신의 노예 도입을 지지했다. 이렇게 노예가 당연시되던 시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당도했을 때 만난 사람들을 사물로 취급했다는 일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 인종적, 차별적 언행이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스페인으로 건너간 인디저너스들은 스페인 시민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는 노예화로부터 보호화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왕실은 노예 제도에 세 가지 예외상황을 두었는데 인디저너스가 그 중 하나였으며, 정당한 전쟁에서(이것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지는???) 포로로 잡은 경우, 몸값의 대상에서 구조된 경우가 그렇다. 과연 인디저너스들은 노예제도의 문제와 논쟁을 몰랐을까?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르틴의 예가 특히나 기억에 남는다. 그는 “나는 자유를 원한다.”하고 외치며 노예를 벗어나기 위한 법정 투쟁을 끈질기게 했다. 멕시코 출신 마르틴은 9~10살 무렵 스페인 왕실 재정 담당 관리인 살라사르의 눈에 띄어 시동으로 일하게 되었다(살라사르는 마르틴의 얼굴에 낙인을 찍을 정도로 잔혹한 사람이었다). 이후 주인을 따라 스페인에 가게 되었고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가사 노동자로 일했다. 살라사르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가 법정에 서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결단과 투쟁은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는 저를 때리고 벽에 밀쳤어요. 만약 다른 이들이 저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마 저를 죽였을 거예요. …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저를 해치지 못하도록 저를 그의 영향권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십시오.” 그의 외침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를 떠올리게 한다. 오늘날에도 성폭력,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등 수많은 사례들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대로 분리하지 않아서 다치거나 죽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가. 


현재 인디저너스들의 문헌과 자료, 유물 등은 대부분 유럽에 소장되어 있다. 승리의 행진과 호기심의 서랍으로 시작하여 "인간 동물원"과 "민속학적 전시"에 이르기까지, 유색인종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무력화하는 수집과 전시 행위는 오랜 역사가 있으며, 그 흔해 빠진 "과학적" 인종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직접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아메리카인을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유럽인의 의도와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전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인종주의는 초기 단계일 뿐이었지만, 당시의 수집가, 역사가, 민속지 학자(종종 종교인들이 "다른 민족"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들을 개종시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는 사람들을 "인종"으로 구분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데에 그것을 이용하는 일을 "자연스럽고" "과학적인" 믿음으로만들었다. 유명한 물건들, 심지어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했던 16세기 수집가들의 열망은 문화, 민족, 그리고 "인종"의 분류와 위계를 구축하는데에 기여했다. - P313


대항해 시대 담배, 카카오, 옥수수, 감자, 토마토 등이 물을 건너 넘어갔다. 유럽을 비롯한 서구는 자원을 상품이자 이익으로 보았으나 인디저너스들은 자신들의 땅을 명확히 인식하고 가치를 이해했다. 땅에서 얻어지는 것은 소중하며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믿음은 “상호주의와 지속가능성의 윤리에 기반한 대지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상품화의 시대 아메리카의 물건은 세계화되었다. 그들은 유럽인에게 자신들이 가진 작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주었고 연결망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유럽인의 문화, 경계와 차별을 직접 확인한 인디저너스는 자본에 따라 일부는 부를 쌓지만 또 다른 일부는 굶는 사람들이 있는 등 심각한 불평등에 놀랐다. 유럽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거부감은 인디저너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고 한다. 유럽의 불평등을 그들이 인식했다는 시실이 흥미로웠다. 


1519년 코르테스가 아메리카에 왔을 때 아길라르와 말린친을 만났고 둘은 코르테스의 현지 통역사가 되었다. 아길라르가 스페인어를 마야어로 통역하면 말린친은 마야어를 나우아틀어로 통역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나우아틀어를 마야어로, 이를 다시 스페인어로 통역했다(지역마다 언어가 달랐다). 말린친은 스페인어를 빠르게 익혀 나중에는 코르테스의 수석 통역사가 되었다고(말린친은 나중에 코르테스 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나중에 펠리페 2세의 비서가 된다). 인디저너스들에게는 이윤을 좇아 대서양을 건널 필요가 없었으나 많은 젊은 인디저너스들이 개인의 욕심, 가문과 공동체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대서양을 건넜다. 이처럼 그들은 대륙 간 중재자이자 통역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문화 사이를 오가는 법과 언어를 배운 “중재자들”은 중간 지대에서 자신들에게만 허락된 기회와 통찰력을 지닐 수 있었다. 

아 폽 바트스는 유럽인이 왔을 때 경례를 거부하고 깃털을 세우고 케치 복장을 하면서 위신을 세우는 것으로 ‘우리를 함부로 보지 마라!’를 강조했다면 외교관의 선례를 만든 목테수마 가문 같은 인디저너스들의 활약도 존재한다. 이들은 대서양을 정기적으로 건너고 사절단과 외교관을 스페인 궁정에 보내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협상했다. 인디저너스 귀족 가문 연맹이었던 틀락스칼라 상류층은 스페인과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유럽에서 인디저너스의 역사는 배제되거나 억압되거나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책에서 보듯 그들도 새로운 땅을 찾아 기회를 얻고 연결된 상업망을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으며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협상을 벌였다. 그들에 대한 시선을 박물관에 새겨진 어느 존재처럼 보는 일은 벗어나야 한다. 저자의 노력처럼 인디저너스 여행자를 찾아내는 일을 통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고 희미한 삶들은 너무 닳은 나머지 서구 역사에 아주 옅은 흔적만을 남기는 듯 보이지만, 쌓이고 쌓여서 그 여행가들에 대한 과거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눈에 띄고, 때로는 평범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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