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하여 깃발을 꽂고 소유권을 주장한 백인들에 대해서 고정되거나 획일화되지 않은 매우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공동체들이 새로운 교역망을 맺기로 했으며(혹은 그러기를 강요당했으며), 탐나는 재화의 생산자나 공급자, 혹은 거래 당사자가 되었다.- P210
많은 인디저너스들에게 거래는 의무 및 이해, 상호주의등 더 큰 연결망의 일부로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들은 친선, 외교, 동맹이라는 틀을 설정했고, 상호 간의 이해를 바라며 아낌없이 제공했다. 목테수마 황제가 코르테스에게 "내가 다스리는 모든 영토와 그에 속하는것들은 당신의 뜻에 따를 것이며 당신에게 복종할 것입니다.......당신은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집에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환대이지 권력의분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디저너스의 예절과 상호 관계에 무지했던그 정복자는 그 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P240
침략으로 인한 첫 충격이 지나간 후, 정치적 목적으로 대서양을 건넌 원주민 남성들(그리고 종종 여성들)은 더 이상 모르는 이들 사이에 내던져진고립된 개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국제법이라고 부르는(국제법은 이 시기 인디저너스 외교관들의 이의 제기에 대한 답으로서 그 기초가 형성되었다) 부문의 뉘앙스에 정통한, 교양 있는 외교관들이었고, 자신들보다 앞서 대서양을 건넌 여행자와 법률 조언자, 식민지 관리들의 경험과지지를 활용할 수 있었다.- P276
대서양을 건너서 행해지던 외교적인 노력은 16세기에 도시, 주, 가문,
관을 대표하는 인디저너스 대표들이 법정에서 관심을 받고자 경쟁해면서 범위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졌다. 그중에는 수행원을 대동한 공식사절단, 가족과 친척, 하인을 대동한 귀족, 때때로 스페인 관리나 성직자를 대동한 개인, 혹은 혼자인 사람도 있었다. … 그들이납치되어 통역을 맡게 된 우발적 외교관이든, 가족이나 지역, 혹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분쟁을 중재한 자발적 외교관이든, 혹은 단지 만나본 적 없는 먼 지역의 지배자에 대한 확신이나 정보를 원했던 사람이든간에, 이 아메리카 토착 정치가들은 왕궁과 제국의 중심지에서 눈에는 소수자로서 유럽 사회의 형성 및 대서양 횡단 무역에 기여했다.- P280
승리의 행진과 호기심의 서랍으로 시작하여 "인간 동물원"과 "민속학적 전시"에 이르기까지, 유색인종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무력화하는 수집과 전시 행위는 오랜 역사가 있으며, 그 흔해 빠진 "과학적" 인종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직접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아메리카인을 전시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유럽인의의도와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전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인종주의는 초기 단계일 뿐이었지만, 당시의 수집가, 역사가, 민속지학자(종종 종교인들이 "다른 민족"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그들을 개종시키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는 사람들을 "인종"으로 구분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데에 그것을 이용하는 일을 "자연스럽고" "과학적인" 믿음으로만들었다. 유명한 물건들, 심지어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했던 16세기 수집가들의 열망은 문화, 민족, 그리고 "인종"의 분류와 위계를 구축하는데에 기여했다.- P313
작고 희미한 삶들은 너무 닳은 나머지 서구 역사에 아주 옅은 흔적만을 남기는 듯 보이지만, 쌓이고 쌓여서 그 여행가들에 대한 과거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눈에 띄고, 때로는 평범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P335
침략 초창기에 스페인 여성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므로, 많은 남성들이인디저너스 아내를 선택하거나 강제로 취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식민지에서의 변화무쌍한 관계를 쉽게 받아들였을지라도, 인디저너스 아내나 연인과 함께 유럽으로 귀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인디오를 완전한 국왕의 신민으로 여기고 기독교도로 취급하는 온정적인 서사가 흘러넘쳐도, 스페인 남성이 자신의 인디저너스 파트너를 유럽으로 데려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최상류층의 원주민 여성을 제외한 인디저너스 여성이 스페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기는 매우 어려웠다.- P191
대서양을 걸쳐 형성된 가족의 연계를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상류층 인사들은 아메리카를 오가는 여행 허가증에 이름을 기재하지만, 가족 구성원을 포함한 다른 많은 이들은 익명의 귀족이나 사제, 행정가나 크리아도(수행원)로서,
그리고 종종 속거나 강제로 배에 탑승한 포로로서 유럽에 도착했다.- P189
인디저너스들에게는 이윤을 좇아대서양을 건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원주민들이, 특히 대부분 젊은이들이 개인적인 야망과 가문과 공동체를 위해서 동쪽으로 여행했다.
유럽인들이 남긴 자료에는 인디저너스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한 탐험가 및 침략자들에 의해서 중재자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남아있지만, 이들은 침략자의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동포들을 위한 외교관이자 브로커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굉장히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대서양 횡단 여정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이중 신분은 문제가 되기에충분했으며, 그들의 충성심 역시 의심의 눈초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네판틀레라스, 즉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P140
왕의 "가신"으로서, 인디저너스는 스페인 시민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로는 노예화로부터 보호되었다. 그러나 식민화 초기에 왕실은 노예제도에 세 가지 예외 사항을 두었다. 첫째, "식인종인 인디저너스는 노예로 삼을 수 있었다. 둘째, "정당한 전쟁just war**에서 포로로 잡았다면노예로 부릴 수 있었으며, 셋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몸값의 대상에서 구조된 경우에도 노예화할 수 있었다.- P80
이름은 중요하다. 이름은 우리 자신을 부르는 것이며, 사람들이 우리를언급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였는지를 나타내는 것이자 상대방이 그와 나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