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식민주의 역사는 동남아시아를 서구의 위대한 팽창 과정에서 별다를 것 없는 배경쯤으로 축소하고 폄하했다. 반면 민족주의 역사는 아시아인을 행위자가 아닌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를 강화하거나, 지역 연구를 국제적 역학이나 비교로부터 고립시키는 식으로 문제점을 바로잡으려 애써왔다. 동남아시아인이 직접 쓴 사료를 발굴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과업을 시작한 것은 동양학 연구였으나, 이 잡학다식한 전통은 왕실 연대기, 종교적 주석, 서정적인 운문이 생산과 교환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일러주는 길잡이가 되지는 못했다. - P17
‘대항해시대’는 익숙하다. 그러나 그 항해란 대부분 유럽에서 출발하여 아시아 등으로 뻗어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기반으로 향후 제국주의, 식민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그동안 과연 아시아의 관점에서 대항해시대를 바라본 시도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이 거의 없다. 이 책은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를 세워 동남아시아에 패권을 구축하기 전 16~17세기(길게는 15세기부터)의 역사를 동남아시아(남부인 도서부와 중북부의 대륙부)를 공간적 배경으로 전체사를 다루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동안 동남아시아사는 대부분 특정 도시사, 여행기, 지리사, 문화사 등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원서는 더 있을지 모르나 번역서는 적어도 그렇다).
1권은 동남아시아의 환경(인종, 지리, 문화 등)을 다루고 2권은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 역사를 다루었다. 1권을 통해서 동남아시아의 지리적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한 후에 2권을 읽으면 역사의 과정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리, 문화적으로 동남아시아 남부 해안의 도서부 지역과 중북부 내륙 지역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지의 북부는 종교적으로 소승 불교를 믿었고 중국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특히 베트남). 반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도서 남부 지역은 해안을 통한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하여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빈랑, 의술에 대한 이야기 등을 먼저 짧게 언급해보면 빈랑은 가벼운 환각성 진정제로 빈랑야자 열매를 빈랑이라고 하는데 구장 잎(Piper betle)과 석회, 세 가지 재료를 함께 씹으면 붉은색 침이 많이 분비되어 뱉게 되는 것이다. 빈랑 씹기는 의례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핵심적인 요소였다. 동남아시아 의술은 약초를 섞은 음료와 목욕, 마사지로 이루어졌다(빈랑 씹기는 기생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경험에 의거한 민간 의술과 마술 등이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유럽인들의 시각에서는 비과학적이라고 보았겠지만 이들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기가 긴 동남아시아는 자연 환경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주거용 집은 나무로 건축을 했고 바닥을 지상에서 띄워 해충으로부터 보호했다(물론 스투파 등의 종교용 건축은 (벽)돌로 튼튼하게 지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목욕으로 몸을 께끗하게 하고 옷과 장신구를 통하여 치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머리카락 또한 자기 표현 방식으로 생각했다 한다. 수공예, 금은공예, 도자기류나 금속류는 그들이 자연에서 준 선물을 바탕으로 제련한 상품이자 무기였다.
동남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여성이 강력한 자율성과 경제적 지위를 갖고 있었고 성 관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며 일부일처제에 이혼이 쉬웠다. 통치자가 여성인 경우도 많았으며 통치자를 보호하는 경호원 여성 부대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외부인들이 아마존 여전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대항해시대(교역의 시대. 개인적으로 대항해시대라고 하는 용어는 서구적 시각이 덧입혀진 것 같아 별로지만 그렇다고 교역의 시대라고 하기에는 다른 시대와 구별이 되지 않을테니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를 장기 16세기(15세기에서 17세기)로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첫 번째로, 동남아시아산 후추, 정향, 육두구가 장거리 무역 품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동남아시아가 장거리 무역의 중심지이자 출발지 또는 경유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향, 육두구는 유럽에서는 14세기 후반까지, 중국도 15세기 전까지는 구하기 어려워 귀하고 비싼 품목이었다. 정향은 1770년 말루쿠제도에서 독점 생산되었고 육두구는 18세기까지 반다 제도에서만 생산되는 품목이었다. 후추는 인도 남서부 케랄라가 원산지였는데 1530년경까지는 지역 자체에서만 소비되거나 중국에만 공급되다가 16세기 주변 지역까지 수요가 늘고 17세기가 되면 유럽 지역까지 퍼지게 된다.
1400년대 초 명나라 정화 원정을 시작으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작물 재배 수요가 늘며 동남아시아 교역이 활발해졌다. 이후 중국 사무역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남중국해를 지나는 선박수가 늘고 포르투갈, 일본 산 은이 거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동남아시아는 핵심적인 중계 무역항이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잉글랜드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가세하게 된다. 인도산 직물은 인도, 중동, 유럽으로 나가는 수출품 중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는데 최고치 시기는 1510년과 비교하여 4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한다(1680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주도하여 공급하면서 유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동남아시아 정크선은 용골을 기반으로 쇠못을 쓰지 않으면서도 튼튼하여 유럽인들도 이를 보고 수준에 놀랐다고. 주로 남중국해 정크선은 중국인 공동체가 커지면서 선주가 되었고 동남아시아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상 교역은 상인이 배를 직접 타고 일정 비율을 배 짐칸 사용료로 내며 물건을 파는 경우도 있으나 신탁을 이용해 나코다(대리인)에게 판매 대금 일정을 지불하고 물건을 판 나머지를 돌려 받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내륙 교역은 강과 육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아무래도 빽빽한 삼림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강수량이 많아 불어난 강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여 험난했다.
무역 기반 도시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도시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특히 계절풍이 교차하는 곳인 말라카 해안 등은 자연스레 무역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시에는 부유한 외국 상인이나 봉신(귀족)이 몰려들었는데 귀족이 사는 단지는 자체 구역이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귀족에 딸린 하인들이 사는 가옥에 둘러싸인 형태가 되었다 한다. 성벽과 해자는 도시를 성장하게 하고 외부 공격을 막기 위해 특히 중요했다. 무역의 증대로 통화 유통을 중개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금융 조직, 국제 집단이 생겨났고 동남아시아 도서부 국가들에서는 무역하러 온 외국 상인이나 왕실과 무역상 중계인인 오랑카야가 상업을 지배하면서 귀족 위치를 차지한 이들이 있었던 반면 교역에만 전념하는 여성, 항해 상인 키위와 그 상위 지도자인 나코다가 있었다.
교역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외부의 변화를 인식하게 된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변화해야 한다 여겼다. 그러나 권위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 체제는 전통 신앙을 이끄는 주체인 여성보다 경전 종교를 이끄는 남성의 지배력을 상승시키려 했고 망자의 영에게 기도하고 재물을 바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등 경전 종교 수용에 일정 이상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부 지역 통치자(와 가족)가 메카 성지 순례를 가고 율법 샤리아를 적용시키면서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충성도를 매기려 하면서 이슬람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는 외부와의 교역이 시작되고 유럽의 군사력이 유입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이미 왕가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불교적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다. 이렇게 1570년대부터 1630년대 필리핀은 그리스교도화, 동남아시아 남부는 이슬람화, 북부 지역은 상좌부(소승) 불교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동남아시아 국가의 통치자들은 교역의 시대 무역 세입, 군사력 동원, 외교 등을 통해 역량을 동원하려 했는데 이것이 흥망성쇠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 때 교역을 얼마나 빨리 선점하느냐가 핵심 요소가 되었다. 무역 세입은 교역 성장으로 인한 상업화와 화폐 경제를 이끌었고 총포와 무장갤리선은 왕의 지배력과 권위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친서를 바탕으로 한 외교는 국가 인식과 무역 확대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7세기(구체적으로는 1629년)에 들어서면 앞선 이유들 때문에 동남아시아는 쇠락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유럽은 선상에서 강력한 화력을 지녔고 요새를 만들었으며 아시아인과 동맹을 맺으면서 우위를 선점했다. 구체적으로 1629년 동남아시아의 아체와 마타람이 유럽 세력에 패배하고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리한 것이 원인이었다. 화물 운송을 책임 지던 버고의 몬족과 자바 북해안 파시시르의 자바인이 국제무역에서 사라진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금은 공급이 축소되면서 전반적으로 세계 무역이 퇴조했고 전지구적으로 기온이 하락하면서 작황이 좋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유럽 세력이 밀려들자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자체 봉쇄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환금성 작물 재배를 중단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오히려 무역 이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명나라 정화 원정 이후 동남아시아 곳곳에 만들어진 중국인 공동체는 항구 밖에서 살다가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국가 내 갈등을 빚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유럽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강조한다.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밀어닥친 유럽에 밀려 몸을 사린 동남아시아가 패배한 것이다’ 등의 시각을 두고 하는 이야기다. 앞서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교역의 시대 동남아시아는 역동적인 흐름을 주도하며 세계 무역의 판도의 정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책은 과거에 나온 동남아시아 지리, 문화 등에 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럽인의 기행문 등을 참고하여 쓰여졌다. 다만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애초에 쓰여지지 않은 빈 공간의 자료는 상상으로 채워갈 수밖에 없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도 그 점을 인정하지만 그마저도 지금까지 이렇게 동남아시아 관점에서 전체사를 조망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책은 그것만으로 값진 책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1,2권을 각각 마무리하는데 5년 정도의 텀이 있었다고 한다. 5년의 공백이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그만큼 자료를 취합하고 분석한 뒤 나름의 관점을 정리하는데 많은 애를 먹은 것 같다. 이 시기 역사를 균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 나와서 기쁘다.
교역의 시대의 특징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통합해내는 지속적인 혁신이었다. - P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