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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 정진아
  • 27,000원 (10%1,500)
  • 2022-05-30
  • : 406

역비총서 시리즈 전작을 읽은 뒤 독서 모임을 하면서 이 책이 다음 권임을 알게 되었다. 전권이 현대 한국 사회과학 형성의 계보를 정리했다면 이 책은 경제 정책의 초기 형성을 정리했다. 두 책을 연이어 읽고 나니 서로 보완되는 측면이 있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상이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의식관념과 인식체계, 이를 기반으로 한 목적의식적인 사고 활동이다. 사상사는 역사적 현실 세계와 결부된 이러한 의미의 사상 전개와 그 발전사를 중심으로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정책사상사 연구방법론이란 해방 후 현실에 대한 학자 및 관료를 비롯한 지식인층 일반의 인식체계 및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구상과 이념을 파악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체계화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 P26~27


앞선 사회과학의 계보를 정리할 때도 사상사적 방법론을 사용했지만 이 책도 그렇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저 정책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상사’가 역사적 현실을 담은 사상을 추적하며 역사를 재구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대체 담당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 세계와 어떻게 절충시켜나갔는지 들여다보는 과정이야말로 그들의 인식 세계를 확인해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 정책과 정책을 내놓은 관료들의 면모를 확인하다 보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정리 시기를 1945년부터 1960년대로 한정했다. 해방 후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미국의 압도적 영향 하에 들어선 뒤 한국이 자본주의의 경제로 정해지기까지를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국민들은 사회 복지, 균등 분배 경제 정책을 원했다. 그래서 정책 담당자들은 이를 고려하여 농업 분야는 지주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국가 통제하에 공업 생산력을 증강시켜 산업 구조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에는 합의했다. 다만 경제주의 주체를 누구로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우파는 자본가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중간파는 중소농과 중소자본가, 노동자에 손을 들어준 것이 달랐다. 그래서 정부 수립 초기 경제 관료진은 기획처, 농림부에는 계획 경제론자들(중간파)을 기용하고 상공부, 재무부 등에는 자유 경제론자(우파)를 배치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계획 경제론자들은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공동 생산 협동 정책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정부 내부의 견제로 인해 정책은 조기에 좌절되었다. 자유 경제론자들은 소농체제를 육성하고 미국 원조를 바탕으로 통제를 최소화한 자유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이 추진된다.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미국이 급브레이크를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남한 정권은 공산주의 투쟁과 산업부흥 정책을 병행한다. 하지만 미국이 원조를 차단함으로써 꼬리를 내린 정책론자들은 한미경제안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안정 추구 방향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통화량 조절, 긴축 금융, 귀속재산의 급속불하, 조세증진을 통한 세입 증대, 정부 보조금 폐지, 통제 완화 등을 담은 경제안정 15원칙에 의거한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인플레이션은 잡혔으나 산업은 오히려 위축되었고 소비재 산업에 급속히 자금이 몰리면서 산업 구조의 불균형 문제가 생겨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특수로 물가가 대폭등하여 정부는 비상이 걸린다. 유엔금이 준 대여금과 세입 마련을 위한 한국 은행 차입은 인플레이션을 더 심화시켰고 물가를 더 폭등시키는 악순환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통화 증발을 억제하고 유엔이 준 대여금을 상환하고 통제 경제 정책을 실시하며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자는 방안을 내놓는다. 필수 민생 부분에 한해 국가가 물자와 자금을 알선하고 통제하고 그 외 분야는 자유롭게 하겠다는 관리 경제 방침을 발표한다. 이는 개인 기업을 성장시켰으나 국공엽 기업체가 부진을 겪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전시경제 정책을 맡은 담당자들은 재무부국장 백두진, 차관 김유택, 이재국장 송인상, 회계국장 박희현이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해 수입 내 재정 지출을 하는 초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정부 재정의 적자는 더 발생하지 않았으나 애초부터 자본금이 없는 중소자본가는 힘들어지고 지주, 농민에게는 해택이 없어 불합리한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는 1952년 말 유엔금 대여금에 지불 능력이 없다고 미국에 통보하고 대여금 청산을 위한 통화 개혁을 단행을 발표한 뒤 이를 실시한다. 1953년 2월 미국은 한국의 성의를 감안하여 대여금을 완전히 탕감한다. 1951년 6월 주한 ECA 원조가 끝나고 한미경제안정위원회 운영이 중단되면서 한국 정부와 유엔사령부 합의 하에 합동경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52년 상공부 주도 하에 시행된 상공생산종합계획은 전쟁 물자 생산을 밑받침하기 위한 단기 계획 성격을 띤 정책이었다. 재건기획팀은 기획처장에 원용석과 상공부장관에 안동혁을 중용한 뒤 기획처와 물동계획국 주도하에 기간산업 복구를 위해 장기계획인 부흥물동계획을 세웠으나 원조액 대부분이 재정 적자인 정부에 쓰여지면서 정작 부흥 정책에 쓰여지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념 체제 경쟁에 따라 남한은 자본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자유경제론자들의 입김이 거세졌고 미국이 국유화, 사유재산권 제한을 명시한 제헌 헌법 조항을 문제 삼으면서 개헌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경제위원회는 국영기업체 지정을 해제하고 민유민영방침을 내세우며 이를 위한 자본은 한국 산업은행의 융자로 확보하고 차후 민간에 양도한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권은 경제조정관에 김현철을 기용하고 한일관계 개선과 재정금융 안정을 하는 대신 미국에 기간 산업 건설에 쓰겠다며 원조증액을 요청했다. 이때 백두진이 물러나고 3년간 중지중이었던 합동경제위원회가 재개되면서 정례화되었다. 

1956년부터는 전후 재건을 마치고 정부에서도 경제 자립과 부흥을 위한 정책으로 경공업과 중공업의 동시 발전을 병행하기로 한다. 이승만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인태식을 재무부장관에 기용하고 미국에 대충자금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요청을 거절한다. 인태식은 산업자금을 위해 정부가 가진 달러를 팔기 위한 산업부흥국채를 발행하자고 제안하는데 유엔사령부 경제조정관 윌리엄 원은 이에 딴지를 걸며 산업자금은 대충자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김현철이 이를 중재하며 산업부흥국채 집행은 세입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도록 한다. (1957년부터 시행된 이 정책은 이승만이 퇴진하는 1960년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갈수록 산업 수준을 하락시키고 제조업의 불황을 초래하였으며 대기업과 정부의 유착 관계를 심화시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1957년 김현철의 뒤를 이어 송인상이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에 취임했다. 부흥부는 처음으로 여론을 참고하여 장기경제개발을 위한 기관으로 부흥부경제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문가를 물색했다(그전까지는 정부 입맛대로 기용했다는 이야기).  미국에서 산업 기금을 확보한 뒤 1958년 경제개발위원회를 산업개발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분야별 전문성을 고려하여 위원들을 선정한다(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도 두루 포함시켰다). 이렇게 시작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1차로 생산력 증강과 국제수지 개선을 1차 목표로 했다.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향후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의 프리로드 성격을 갖는 것이었으며 향후 자립경제 체제 확립을 조성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계획경제 정책과 관리경제 정책, 자유경제 정책이 각축하고 경합하는 가운데 그 기본 구조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한국 경제의 역동성을 만들어낸 요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가 중심으로 정초된 한국 경제정책의 계급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원조자금이 들어오는 동안 공업화와 생산력 증진에 매진함으로써 경제자립을 달성하려고 했다. 관민협조, 노자협조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생산력 증진의 주역으로 상정된 반면, 농민과 노동자들은 작업장과 마을 단위에서 자활과 자립을 통해 국책에 부응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전후재건사업과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및 분배와 계급 문제 해결을 후순위로 돌린 채 경제성장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정부와 자본가의 유착관계가 심화되는 가운데 노동자, 농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 P377


그 결과는 역사가 말해주듯 4.19혁명이었다. 미국의 역할도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게 컸음은 앞선 바대로다. 경제 관료들의 정책에 미국의 입김과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한국전쟁은 해방후 사회분배와 평등정책이 더 우선이었던 상황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의거한 자유경제로 완전히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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