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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이음매 없이 짜인 거미줄과 같아서 역사의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 얽힌 맥락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바람아래의땅‘처럼 국제 교역과 긴밀하게 얽힌 부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지역을 연구하는 우리는, 그 연결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동남아시아인을스스로의 역사적 무대에서 구경꾼으로 만들지 않기가 무척 어려운 것을 잘 안다. 20세기 전반 50년 동안 식민주의 역사는 동남아시아를 서구의 위대한 팽창 과정에서 별다를 것 없는 배경쯤으로 축소하고 폄하했다. 반면 민족주의 역사는 아시아인을 행위자가 아닌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해, 오히려 식민주의 역사를 강화하거나, 지역 연구를 국제적 역학이나 비교로부터 고립시키는 식으로 문제점을 바로잡으려 애써왔다.
동남아시아인이 직접 쓴 사료를 발굴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드는 영웅적인 과업을 시작한 것은 동양학 연구였으나, 이 잡학다식한 전통은 왕실연대기, 종교적 주석, 서정적인 운문이 생산과 교환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지 일러주는 길잡이가 되지는 못했다.- P17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에 관한 극히 부실한 사료에서 도출한 부정확한 통계 수치는 사용하기를 꺼려왔는데,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수량화 작업 없이 특정한 시기나 지역을다른 시기나 지역과 비교하거나, 동남아시아 자료를 유럽이나 중국처럼누적된 연구 자료가 많은 지역의 더 정교한 사회사와 연결시키기란 불가능하다. 파편적이고 모순되는 여러 자료에서 특정한 수치를 도출하는데는 큰 위험이 따르며 오류가 생길 가능성 또한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전근대 유럽 사회사도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문제를 겪었으며(이 분야에는 상반되고 모순되는 사료가 더 많다), 주저함과 망설임으로 가득한 초창기 이래 거둔 성과에 이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P39
쌀이야말로 동남아시아 최대의 교역 품목이었으므로, 동남아시아 교역의 근간이 사치스럽고 "아름답고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본 판 뢰르의가정"은 옳지 않다. 쌀 수출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보관과 유통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큰 도시 지역의 쌀 소비 시장이출현하면 쌀 생산지는 금방 뒤따라 생겨났다. 북수마트라의 근세 이래쌀 잉여 생산지인 적 없었던) 델리가 연간 쌀 300톤을 생산해 1640년대에전성기를 누린 아체에 쌀을 공급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네덜란드의 봉쇄나 지역 경제 위축으로 쌀 수입량이 줄어들면, 1650년대아체와 1630년대 반튼 주변에서 그랬듯 인근에 벼 재배지가 생겨났다.- P55
새로운 국가 대부분에서 국가적 양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은 종교적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수용은 거의 예외없이 복식뿐 아니라 머리 모양, 몸치장에 변화를 가져왔다. 여러 종족에- P140
게(자바인은 아니지만) 말레이식 문화적 타협이 이슬람 복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기본적인 사롱 위에 여성은 바주나 크바야 같은 상의가, 남성은비슷한 헐렁한 웃옷과 두건이 더해졌다. 여성용 스카프(슬렌당selendang)는 다른 용도로 살아남았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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