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와 조슈번의 하급 무사들이 역성 혁명을 일으켜 막부를 타도하고 근대 천황제를 확립(하여 지금의 일본이 있게 만든)한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삿초 사관). 하급 무사, 그러니까 행동 대장들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메이지 유신 3걸로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막부 말기에는 다양한 세력 간에 투쟁이 있었기에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메이지 유신의 과정과 결과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저자는 개인의 활약보다 사쓰마 번이라는 집단의 결정에 더 주목하며 당시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의 생각과 행동에 힘을 싣는다. 한 마디로 사이모 다카모리는 그동안 과대 평가되어왔고 시마즈 히사미쓰는 과소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1950년대 이후 메이지 유신을 평가하기 시작했고 패자인 막부의 입장이나 승리한 사쓰마, 조슈 번의 입장이 아닌 다른 번들의 입장에 대한 해석도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리우스 잰슨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이라는 책에서 도사 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이끌어내기도 했다.
책은 메이지 유신 전후의 과정 뿐 아니라 사쓰마 가문에 대한 배경 정보를 위해 앞선 역사를 개략적으로 다룬다. 사쓰마 번이 막말 정국의 핵심으로 들어오기까지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 알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보여지므로 저자의 탁월한 선택이라 보인다.
고대 중앙집권 체제에서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하면서 지방 분권 정부가 시작되었다. 이때 유력 농민 세력들 중에 개간한 토지를 중앙 권력층에 바치고 장원의 관리인이 되는 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중앙 권력의 뒷배를 빋고 혜택을 받으며 장원을 늘려나갔다. 후지와라 사유지였던(5대 때 성을 고노에로 바꿈) 시마즈 장원을 가신인 고레무네 다다히사가 장원 관리를 맡은 이후 영향력을 키워 나간다. 후에 고레무네 다다히사가 성을 시마즈로 변경하는데 이것이 시마즈 가의 출발이다.
시마즈 가가 돈을 많이 벌어들이게 된 계기는 1609년 사쓰마가 류큐(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 류큐는 중국과의 조공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오고 있었는데 이에야스에 의한 명으로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쓰네로 하여금 류큐를 점령하게 한 것이다. 사쓰마 번은 류큐에 관리를 파견하고 명, 청과의 조공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하고 미국 페리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막부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제후 및 정계 인사들에게 대책을 자문하기 이른다.
시마즈 히사미쓰가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것은 1862년 솔병상경(막부 허락 없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향한 일)부터다. 그는 사쓰마 번 내 정치 입지를 강화하고 혼란스러운 일본 정국을 이용하여 막부 정치에 개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히사미쓰의 솔병상경을 전후로 양이의 주체가 완벽하게 달라진다. 페리 내항 이전 막부의 외교 정책은 개국과 양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지만, 내항 이후 막부는 개국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이에 동조한 것은 일부 번주(특히 히토쓰바시파 개명 번주들)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지배층과 서민들은 개인적 수준에서 정서적 양이론에 머물러 있었다. 외국인을 살상하고 막부 최고위층에 위해를 가하며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교토에서 봉기를 주도하던 존왕양이 지사들 역시 이러한 정서적 수준의 양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P284). 히사미쓰가 입경에 성공하자 정국에 주도권을 빼앗겼음을 자각한 조슈 번은 양이론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여기에 도사번이 합류하면서 존왕양이론이 정국의 핵으로 부상했다.
조슈 번은 1,1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교토로 와 양이친정을 건의하고 조정에 결단을 요구하였다. 히사미쓰는 자신이 계속해서 막부 인사 개혁에 관여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서는 천황의 권위가 필요했다. 나카가와노미야는 천황친정을 뒷받침할 실력자를 찾고 있었고 둘은 이렇게 서로 정략적으로 연대하게 되었다. 이들은 8월 18일 양이친정 연기, 급진파 공경의 참내 정지 및 타인 면회 금지, 급진파 공경들의 소굴인 국사참정, 국사기인 역직 폐지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었고 이에 조슈 번과 급진파 공경들은 교토에서 추방되었으며 조정은 공무합체파가 장악하게 된다. 히사미쓰는 천황의 밀칙 하에 ‘무리한 양이는 불가하고, 급진파가 주장하는 왕정복고(천황친정)는 불가하고, 막부에 대한 대정위임에 동의하고, 산조 사네토미를 비롯한 7명의 공가들과 관백 다카쓰카사를 처분한다’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조슈 번은 자신들은 존왕양이의 대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며 탄원서를 조정에 제출하려 하였으나 조정은 이들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사쓰마가 막부로부터 빌린 면을 싣고 나가사키로 가던 중 조슈 번 포대의 포격을 받아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후 벌어진 1864년 참예회의는 대외 방침에 대한 결정 사항과 더불어 자연스레 조슈 번의 처분에 대한 사항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요코하마 쇄항 결정에 결정적으로 반발한 히사미쓰는 이후 참예회의에 더는 참가하지 않았고 교토를 떠났다.
히사미쓰는 돌아가 군사력 복구에 매진하였다. 신식 총포 구입에 매진하고 사쓰에이 전쟁으로 파괴된 집성관(서구 과학기술을 도입해 자립할 목적으로 지음)을 위해 나가사키 제철소에서 기술자를 초빙하고 증기기관 및 서양 기계를 갖춘 기계 공장을 복구하며 주변에 많은 공장을 세우게 된다. 또 육해군 교육기관으로 가이세이쇼라는 양학교를 개설하여 해군 포술, 병법, 축성, 측량, 항해, 조선 등을 교육한다. 이 학교 출신 학생을 중심으로 영국에 유학생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교토에서는 조슈를 지지하는 급진파 존왕양이 지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친조슈가의 인물이 국사로 임명되자 주전파는 때가 왔다며 세자의 상경을 번 내에 알렸다. 이때 과격파 존왕양이 지사들이 모여 정변을 모의하자는 정보가 새어나가 치안유지 조직 단체가 조슈, 도사 번 출신 지사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자 조슈 번은 격분했고 출병하기에 이른다(금문의 변).
사쓰마, 도사 등 번들은 조슈에 대한 신속한 토벌을 요구했고 사이고 지휘 하의 포병의 대활약으로 조슈는 큰 손실을 입으며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어소를 향해 발포한 책임을 물어 조슈 정벌의 명령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히사미쓰는 국내 갈등이 외세 침탈에 빌미를 줄 수 있다며 조슈와 화해와 연대가 필요하다 보았고 이에 삿초 맹약이 맺어진다. 이는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효고만에 출현하는 등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쇼군 요시노부는 프랑스 공사와 회담 결과 효고항을 개항하되 사쓰마와 조슈에 대항을 해달라는 조약 이행 서명을 했다(문제는 조약 이행에 대한 제후들의 의견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
1867년 교토의 사쓰마 번 수뇌부는 막부 주도의 정국을 타파하고 제번연합에 의한 조정 중심의 정치체제를 위해 히사미쓰의 상경과 유력 제후의 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히사미쓰의 명을 받은 사이고는 전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나리, 전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전 에치벤 번주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설득해 냈다. 4제후가 요시노부에게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나 이후 정국은 요시노부의 주도로 이어질 가능성만 확인한 채 물러나게 되었다. 4후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도사 강경파와 사쓰마 번의 사이고, 오쿠보 등은 삿도밀약을 맺으며 강경 노선으로 들어간 반면 히사미쓰를 비롯한 중신회의는 병력을 교토에 집중시켜 쇼군 요시노부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사임을 유도해내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이후 4후회의의 계획은 좌절되고 삿도 밀약 세력들에 의해 왕정복고 쿠데타가 벌어졌고 이는 메이지 정부를 탄생시킨다.
책은 이렇게 메이지 유신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사쓰마 번(의 히사미쓰)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리하며 삿초 사관에 사려진 인물들을 다루었다. 메이지 유신이 몇 사람의 영웅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압과 내부 충돌에 의한 복합적인 정치성과 국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막부가 프랑스가 배후에 있었다면 삿초 세력에는 영국이 배후에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의 중심은 사쓰마 번이고 막부를 무너뜨린 주도 세력의 한 축이다. 이는 엘리트 중심적 시각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700년 사쓰마의 역사는 공교롭게도 자신들이 무너뜨린 막부의 운명과 함께한 꼴이 되었다. 하지만 히사미쓰를 비롯한 사쓰마 무사들은 결코 일본은 식민지가 되어서는 안 되며, 기존의 막번 체제로는 식민지로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10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번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총력으로 매진한 결과, 그들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주도의 중앙집권 국가라는 신체제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물론 새로 만들어진 일본이 과연 그들이 원한 것과 얼마나 일치하였는가는 알 수 없다. - P396~397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고(?) 막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일본의 시도는 역설적으로 타국을 침탈하고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삿초 사관과 메이지 유신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일본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숨어있는 폭력성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