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시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베트남의 역사일텐데 이는 우리와도 깊은 관계를 가진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인 도미엔은 베트남 전쟁기 한반도와 베트남 관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이 책은 그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결과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기에 관한 책은 있지만 주로 미국 등 서방의 사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박태균의 베트남사가 있을 것이다. 또 10여년 정도 전에 나온 유인선의 베트남사는 현대사에 집중된 책은 아니지만 이웃인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전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도 두 저자의 책은 자주 언급되곤 하지만 아무래도 읽다 보면 한계가 느껴진다. 이 책은 미국, 소련, 중국 뿐 아니라 베트남 등 다국적 사료를 바탕으로 교차 분석하여 다양한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동안 국내 학계에서는 아무래도 베트남과 남한, 미국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분석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미 남한과 남베트남의 관계는 어느 정도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으나 상대적으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알려져 있는 지식이 너무 협소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있다.
시대적으로는 1950년대부터 1975년 베트남 종전의 해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는 1950년 양국 간 수교를 맺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중국은 베트남과 북한에 적극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양국 간 다리를 놓았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남은 군대를 파병했는데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이는 북베트남의 권유로 한국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던데다 중국을 통해 베트남군이 북한으로 이동했고 북한과 북베트남도 이 일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군은 전쟁 중 중공군에게서 땅굴 전술을 익혔는데 이는 향후 베트남 전쟁에 쓰이게 된다. 1951년에는 베트남 인민 대표단이 북한에 입국한 일이 있었다. 호찌민 주석의 지시로 이루어진 이 방문은 북베트남-중국, 북한-북베트남 관계를 강화하는데 역할을 했다. 이들은 귀국 후 1952년 보고회를 열고 출판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과 북베트남은 1950년대 사회주의 연대에서 출발하여 반미, 반제국주의 의식에 대한 교감을 바탕으로 문화, 경제, 과학 교류를 열었다. 북한은 천리마 운동을 바탕으로 놀라운 경제 성과를 이룬다. 베트남은 북한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 친선 운동을 벌였다.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소련의 평화공존 정책은 1960년대 초까지 유지되었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중소 갈등이 벌어졌을 때 초기에 북한과 북베트남은 이념적으로 소련보다 중국의 노선을 지지했다. 중국도 북한과 북베트남의 협력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기에 양국에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남베트남 내전으로 폭동과 내전이 벌어지자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남민전)이 만들어졌다. 1960년대 베트남에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시작되자 이들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민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무기 등을 지원했다. 미국이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능했고 부패했으며 인민들의 인권을 여러 모로 탄압했다. 남민전 혁명 세력은 조국을 미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남베트남에서 혁명투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비슷한 시기 남한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으니 북한 정부로서는 남민전의 활동에 주목할 이유가 충분했다. 1963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은 북베트남을 방문하면서 남베트남 투쟁에 대한 북한 지지가 이루어졌다. 북한은 대남정책을 전환하여 예전의 평화공세는 접어두고 남한에서 혁명세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방침으로 ‘남조선혁명론’을 선언했다. ‘남조선혁명론’은 말 그대로 남한에서 우선 혁명을 승리한 후 한반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남민전이 만들어지고 게릴라전이 늘자 이를 경계하였다. 결국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베트남에 전쟁이 본격화한다.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에 따라 1964년 김일성은 비밀리에 북베트남에 방문 후 회담을 했고 1965년에는 북베트남의 당 총비서인 레주언이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회담을 하는 등 끈끈한 유대 관계를 과시했다.
그러나 소련의 코시긴이 1965년 하노이를 방문하면서 소련, 중국, 북한, 북베트남의 관계는 변화한다. 소련은 베트남을 지원하면서 베트남과의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무렵 남민전이 미 공군 막사를 공격해 미군을 사살하고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미국은 보복 차 북베트남 폭격을 감행했다. 소련은 이 행위가 평화공존에 반하는 행위라며 미국에 대한 비난 공세를 벌였다. 소련은 중국 정부에 비밀서한을 보내 베트남 원조 회담을 제안한다. 소련은 소련군이 중국을 통과하고 소련 공군기가 중국 남서부에 비행장을 사용하며 소련 공군기가 중국 영공을 통과할 수 있기를 중국에 요구했다. 중국은 당연히 소련의 요구가 과도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미국은 중국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염려했던데다 소련과 북베트남의 관계가 개선되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남한이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군대를 파병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에 따른 갈등이 일자 북한은 베트남전에 물자를 무상 지원하고 공군 및 선전 심리 전문가를 파견했다. 이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패배할 경우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보았고 반대로 미국이 베트남에서 고전할수록 남한 내 미국의 기반이 약화되는 동시에 조선 혁명의 가능성이 커지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북한 지도부는 이처럼 조선 혁명과 베트남 혁명을 연결시켜 인민들의 애국심과 국제적 연대성을 바탕으로 김일성 유일 체제를 공고화하고자 했다.
북베트남은 구정 공세를 통해 반전 기회를 만들어 베트남의 통일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자국군에 피해만 가중되는 등 역효과만 불러왔다. 이때 김일성은 성명서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미제침략자들의 각을 뜨자”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체게바라 기일에는 자신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대혁명을 이끌어 가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베트남의 심기를 거스른다(북베트남 정치가들은 김일성의 발언을 ‘민족주의 경연’이라고 비판했다고). 북한은 국제적 의무로 북베트남에 공군을 파견하였음을 강조하였으나 실제로는 조종사 20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만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1969년 이후 북한은 북베트남에 대한 경제 지원을 줄였고 북한과 북베트남의 통일 방식에도 이견이 생기며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중국은 베트남과 한반도 통일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적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이렇게 북한과 중국은 북베트남과 관계가 악화된 반면 북한은 중국과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은 한반도에서도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하며 주한미군이 철수되어야 함을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표방하였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이 되었을 때 북한은 겉으로는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실제로는 소극적으로 호응했다. 양면 전략이었다.
북한은 1970년대 초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단독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자 했다. 베트남의 평화협상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의 북한이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협상을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이 내 생각 이상으로 더 시기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이 군사적이든 외교적이든 습득한 것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겠다. 북한은 김정일로의 승계 구도를 본격화하면서 사회를 단결하고 인민을 동원하며 주체 사회를 강화하는 흐름을 이어나간다.
과거 베트남의 투쟁은 북한에 롤모델이 되었고 이후 베트남의 개혁, 개방이 북한에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여전히 양국은 붉은 혈맹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베트남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한 북한과 북베트남의 관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