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을 읽자 마자 얼른 읽고 싶어서 2권을 바로 읽었다. 2권의 내용은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과 3.1운동의 여파에 따른 상해 임시정부의 생성,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독립운동가 세력과 미국 독립운동 세력 간의 충돌, 미국 내 한인 세력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대목이지만 외부 환경, 내부 세력 간의 입장 차이로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다.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김규식은 외몽골 등지에서 생활인으로 살았다고 1권 내용에서 언급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상해로 귀환했다. 그리고 재미 한인 지도자인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자신이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리며 미리 도움을 요청해두었다(이승만이나 안창호과 접촉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로써 그가 상해로 귀환한 것이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이 준비된 것을 알고 복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북경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도 자신이 파리 강화회의 공식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라는 말을 전하며 조선의 해방을 주장하는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윌슨 대통령에게 쓴 독립청원서는 신정, 김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 신정은 한국공화독립당 총재인 신규식이며 김성은 사무총장인 김규식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한국 병합은 승인된 상태이므로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는 없다로 정리되었다(편지는 혹시 모르니 보관하라 명했다). 비망록은 1919년 1월 말 작성이 되었는데 김규식은 2월 1일 파리로 떠났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측근이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11월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이 상해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여운형은 크레인 환영회에서 중국 처지를 동정하고 중국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라는 말에 자극을 받고 조선인들의 억압 상황과 호소를 담은 청원서를 작성하여 한 부는 크레인에게 전하고 다른 한 부는 밀러드(윌슨 대통령의 측근)에게 전달한다. 1918년 여름부터 여운형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호 등은 이미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는 상태였는데 크레인 청원서 제출을 계기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게 되었고 이때 김규식은 이사장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애초부터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시작을 한데다가 중국 내 입지도 김규식이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록 김규식이 신한청년당의 이사장은 되었으나 과거 동제사 조직과의 오랜 인연으로 동제사 회원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다. 그러나 동제사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이제는 신한청년당이 상해의 독립운동세력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외로 밀사들을 파견했다. 간도와 연해주에는 여운형이, 일본에는 장덕수와 이광수가, 국내에는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가 활약했다. 특히 장덕수는 재일한인유학생과 상해 신한청년당, 동제사를 연결해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파견하고 2.8독립선언을 연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2.8독립선언은 3.1운동에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1919년 2월 24일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상해에 있던 현순이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3월 9일에는 미국에 있던 한인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3.1운동은 민중이 주체로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자 독립운동 진영이 연계망을 형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뒤 잠시 중국인인 이욱영의 집에서 하숙을 하다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그 집을 나온다. 4월 말에는 파리 샤토덩가 38번지에 파리위원회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4월 말에 상해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 김탕, 5월 18일 전후에는 이관용, 6월 3일 황기환, 6월 말에는 조소앙, 7월 초에는 여운홍이 조직에 합류했으나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 및 비망록을 전달한 것은 5월 10일이었으므로 김규식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다. 5월부터 6월 사이에는 김규식은 미국 측과 접촉을 시도하며 고군분투를 했다. 미 대표단은 3.1운동에 미 선교사가 개입했다거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책임을 지우려는 일본 측 주장(미 선교사와 3.1운동을 그런 식으로 엮는다니…)에 반대했으나 그 여파가 자국에 미칠 영향 때문에 묵과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이익이 없는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대통령 고문의 통역이나 국무장관의 개인 비서, 극동전문가 등은 김규식에게 대체로 호의적이고 한국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서 성과 없이 끝나자 김규식은 국제 연맹에 임시 정부를 승인받는 것으로 외교 방향을 전환했다. 통신국을 설립하고 통신전을 간행하였으며 다른 약소국가 대표단과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김규식은 8월 파리를 떠나 워싱턴으로 향하는데 이승만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3.1운동 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된 이승만은 국채 발행권과 신임장을 상해의 현순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다. 이승만은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국무경 지위를 이용해 미국 내 선전을 하고 청원 외교를 벌이다가 상해 임시정부 결성 소식으로 더는 그 자리를 버틸 수 없자 그 후에는 부여된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을 대통령으로 자칭해 부르며 활동을 한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미주의 자금을 독점 관할하여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내 워싱턴에 임시 공사관 본부를 설립하고 구미위원부를 결성하겠다고 하며 재가를 받아낸다.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하자 그는 구미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받았지만 공식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이승만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고 미 한인의 네트워크 및 교류는 한국친우회의 서재필이 관할하고 있는 상태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미 한인이 모은 독립운동자금인 애국금을 줄기차게 보내라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공채금 발행에 목을 맸다. 김규식이 상해와 북미 간 조율을 위한 타협책으로 애국금과 공채금을 병행하는 정책을 제기했지만 결국 이승만은 1920년 2월 애국금을 폐지한다. 김규식은 파리에서 활동할 때부터 과로 누적과 스트레스로 몸이 계속 좋지 않았는데 1920년 3월 병으로 뇌수술을 받는다(미국에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것 뿐인 것 같다). 그는 건강을 핑계대고 구미위원장 사직을 요청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구미에서 자신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승만에 의해 미국의 운동 세력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더는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호주를 거쳐 상해로 귀환한다(상해로 돌아가는 길도 험난했다고). 이 무렵 이승만도 상해 임시정부의 끊임없는 소환 요구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그곳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워줄 사람으로 김규식을 만나기를 요청했으나 거부하자 구미위원장직에서 그를 해임해버리고 만다. 현순이 뒤이어 구미위원장이 되었는데 그가 말많고 탈많은 공사관 설립 등의 폐지를 추진하자 이승만은 현순도 직위에서 해임해버린다. 이승만은 김규식과의 만남을 재요청했으나 비공식 국무회의 자리에서 김규식이 이승만 사퇴를 주장하자 그는 김규식을 학무총장 자리에서 해임했고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는 임정을 떠나게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3.1운동의 영향으로 호기롭게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는 이렇게 분열과 갈등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특사로 해보려는 노력은 일본 등 외부에 입김에 의해 힘이 제대로 실리지 못하며 실패했고 미주에 가서 외교적 힘을 보태려던 그의 생각은 이승만에 의해서 제대로 먹힐 수가 없었다. 이는 미주에 있던 박용만과 안창호도 마찬가지다. 미주 독립운동 세력에도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고 상해 임시정부 내부에도 혼란을 가져온 이승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곱씹어도 참 답답해지는 부분이다.
이제 3권에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