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했던 책을 만나는 일은 정말 소중하고 좋은 경험이다. 저자가 김규식 평전을 준비 및 집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들뜬 기분이었는지 아직도 그 감정이 생생하다. 201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서 2023년까지 초고 완성을 했으니 집필 기간만 자그만치 10년이다. 시작도 끝도 어려웠을 작업이었을텐데 무사히 나와서 정말 독자로서 감사할 뿐이다.
책의 제목을 ‘김규식 평전’이라 하지 않고 ‘김규식과 그의 시대’라 한 것은 왜인가. 김규식은 대한제국부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넒은 시기를 거쳐 살았고 조선, 미국, 중국의 상해, 북경, 몽골, 파리 등 다양한 공간에서 활동했으며 다양한 사람과 교류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만으로 정리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1권의 내용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가족 관계, 성장 환경과 미국에서의 생활, 조선에서의 활약과 상해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이자 해방 후 중도 우파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권은 생소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나 또한 몰랐던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그동안 그를 너무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김규식의 부친은 김용원으로 철종의 어진을 그릴 정도의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고종에 신임을 얻어 일본 수신사로 파견되었고 일본 공관에서 일본인들과 교류하면서 사진술, 유리제조술, 금은분석술을 배웠다. 당시 사진 촬영에는 유리 원판이 사용되었고 감광제를 바른 후 은 용액에 담그는 과정이 필요했다.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귀국 후 촬영국과 순화국(서양 담배 제조회사)을 개설하였다.
1884년 김용원은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된다. 고종은 조러조약 비준서 교환, 조선과의 육로 통상 문제 해결, 외부 압력이 있을 시 조선을 보호하기 위한 공식 사절단 파견 등을 요청했고 러시아 측은 이에 화답하는 밀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청일 모두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 고종은 살아남기 위해 부정, 회피하는 방법을 택했고 김용원은 희생의 제물이 되어 유배형에 처해진다. 김규식은 얼마 후 사망한 어머니, 많았던 형제들도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1886년 만 5살 남짓 된 상태에서 언더우드 고아원에 들어갔다. 김규식의 어학 재능은 출중했던 것 같다. 배운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 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한다. 1891년 유배형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함께 1년 남짓 살다가 할아버지, 큰 형마저 사망하자 그는 스스로 서울로 가 관립영어학교를 수학하고 잡화점에서 영어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독립신문사에서 영어 직원 겸 회계로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16살 무렵 김규식은 의화군의 도미 유학 준비를 위해 언더우드 선교사와 외부 통역관 박용규와 동행하게 된다. 당시 의화군은 고종의 잠재적 정적이었는데 일본에 체류 중임에도 그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고종의 명령으로 반강제적으로 도미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화군은 생면부지인 김규식과의 미국 동행을 거부하고 박용규와 수행원인 신성구와 유학길에 오른다. 김규식은 의화군이 떠난지 40일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더우드와 로녹대학 학장인 드레허와의 인연으로 세일럼의 로녹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로녹대학은 미국 남북전쟁 중에 개교하였으며 1876년부터 외국인 학생을 받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서병규가 한국인 최초의 입학생이었다. 김규식은 4년 내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문학회 활동을 하기도 하고 대학 학보에 글도 썼으며 사교클럽에 간부로 선출되면서 연설 능력도 키웠다.
사실 나는 그가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했다고 잘못 알고 있었는데 이는 시중에 알려진 잘못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고(프린스턴 대학의 재학생 목록에 김규식이란 이름이 없다).
1904년 국내에 들어온 김규식은 YMCA 교사를 하다가 1905년에는 고종의 밀사로 비밀 접선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언더우드의 개인 비서로 일을 했는데 총독부가 교수직을 제안하자 이를 거부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한다.
그는 신해혁명 후 자극을 받아 신규식, 박은식이 만든 동제사 활동에 참가한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기도 했지만 유학 한인 학생들의 생활 학습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김규식은 신규식 자택에서 거주하면서 서서히 동제사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1913년 반원세개 운동인 토원운동이 벌어지자 중국인 의사 모대위란 사람과 적십자 조직을 만들어 출동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당시 중국 전역에서 원세개에 반대하는 세력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원세개 세력에게 진압당했다고). 동제사는 중국에 있는 한인 학생들의 도미 유학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는데 김규식은 상해 거점의 한국 학생 도미 네트워크의 중심 인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추구 및 망명 정부를 수립, 이를 위한 계획을 추진한다. 신한혁명당은 1차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다는 가정 하에 독일, 중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하고 한국 독립의 방략을 추구했다. 독일, 중국은 제정국가이므로 이왕가를 이용하기로 하고 고종과 연락해 그를 당수로 추대하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신한혁명당은 신규식, 박은식을 비롯해 신해혁명을 주도한 친손문세력이자 공화주의 세력과 성낙형 계열의 근왕주의, 친원세개 세력도 있었는데 이는 전략적인 결합이었다. 작전을 위해서는 고종과 접선을 시도해야 했다. 그러나 국내에 잠입한 혁명당 관련자들은 고종을 만나기도 전에 일제에 체포되어 실패했다. 원세개가 사망하고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이전에 추구한 복고주의 왕정이 아닌 공화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목표 쪽으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대동단결선언은 주권불명, 주권재민론을 펼치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김규식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한 중국 내 독립운동을 위해 의주에 잠입해 자금 모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사 훈련 학교를 운영하고자 유동열, 이태준과 외몽고의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으로 넘어가게 된다. 김규식은 러시아 상업학교에서 교사를 하기도 하고 러시아인들에게 영어 개인 강습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몽골리언프로듀스사에서 회계 및 비서 일을 했고 앤더슨마이어사에 취직해서 상해, 천진, 홍콩 및 장가구 지점의 부지배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제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추적했는데 1914년 이후 김규식의 이름은 종적을 감춘다. 1916년 장가구, 외몽고로 넘어간 뒤부터는 위의 활동 내역처럼 생계를 위한 활동에 집중한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그의 청년 시절이 다양한 활동으로 채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와의 유대, 의화군(의친왕)과의 연결고리도 놀라웠고 고종은 아버지 대부터 끈질긴 고리였음을 느끼기도 했다. 유년기 버려진 고아에서 언더우드의 양자로 입적되어 미국 유학을 거쳐 지성인이 되기까지가 한 편의 이야기였다면 국내에서 종교,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중국 망명 뒤 혁명 운동과 독립 운동에 뛰어든 일은 또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2권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시기이자 그의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3.1혁명 이후부터 1921년까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