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
사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전혀 아니다. 다윈에게서 생존하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적합한 자, 즉 적자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진화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강하거나 우수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적합한 종이 자연에 의해 선택된다는 것이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공룡은 강했지만 멸종했고, 매머드도 코끼리보다 훨씬 크고 강했지만 멸종했던 것이다. 자연계에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수한 것으로’ 따위 진화의 방향성은 없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사이에 힘과 문화적 상상력의 위계가 엄연했던 만큼이나 성애의 판타지도 가파르게 위계화되었다. 승리한 나라의 남성이 점령지 여인과의 가벼운 로맨스를 꿈꿀 때, 패배한 나라, 약소국 남성은 수치심과 회한으로, 때로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사정을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해도 좋을까? 그 무렵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한술 더 떴다. "키워줬더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는 식의 혐오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과학사학자 김영식은 현대 한국 과학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을 꼽는다. 개화기 이래 과학기술이 주로 경제적 효용 달성이라는 도구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역설적이게도 일제시기 지식인들에게 과학주의적 태도가 널리 퍼졌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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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상에 쓸모가 없는, 힘이 되지 못하는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사이먼 싱은 말한다. "기술은 삶(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과학자들의 동기는 유용성이나 편리함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작은 사람’이라고 해서 역사의 책임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아니 작은 사람이야말로 역사를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성숙이 시작될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