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거리의화가의 서재

이 지칠 줄 모르는 전사는 무려 18년에 걸쳐 시리아와 이라크땅을 누비고 다녔다. 때로는 진창에 빠지지 않으려고 짚단 위에서 잠을자고, 어떤 이들과는 싸우고, 어떤 이들과는 우호조약을 맺는 등 모두를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광활한 영지 곳곳에 널려 있는 궁전에서 편히 머무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비위 맞추기에 연연하는 간신들이 아니라 그에게필요한 연륜 깊은 조언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한 바그다드는 물론, 이스파한, 다마스쿠스,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심지어 자신의 영지인 알레포와 모술에까지 퍼져 있는 촘촘한 정보망 덕분에 지속적으로 정보를얻을 수 있었다.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다른 군대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P169
언제든지 배반하거나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던 에미르들의 자율적인집단지도체제를 따르지 않았다. 군기는 엄격했으며 지극히 사소한 과실도 엄하게 다스려졌다. … 알레포의 통치자는 다른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그는 도시에 도착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머무를 수 있는 그 많은 성들을 무시하고 늘 성 밖에 있는 자신의 막사에서 묵었다.- P170
단 몇 주만에 장기는 동방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로 특사를 보내 다니슈멘드의 후계자들이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하도록설득하였을 뿐 아니라 바그다드로 선동가들을 보내 1111년에 이븐 알카샤브가 일으켰던 것 같은 소요를 조직하여 술탄 마수드가 샤이자르로군대를 급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시리아와 자지라의 모든 에미르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서신을 보내 새로운 침략에 맞서 힘을 모을것을 명했다. 적의 군대보다 수가 적었던 아타베그의 군대는 전방에 나서지는 않으면서 작은 교란 작전을 펼쳤다. 아타베그는 바실레이오스와프랑크 지휘관들한테 긴밀히 전갈을 보냈다. 그는 바실레이오스-일단은 그가 황제였으니까-에게 자신은 이 연합군이 두려우며 그들이 시리아 땅을 조속히 떠나기를 바란다는 뜻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면서데사의 조슬랭과 안티오케이아의 레몽 같은 프랑크인들에게는 이런 전- P184
언을 보냈다. 일단 룸인들이 시리아 땅의 요새 한 군데를 점령한다면 머지않아 당신네 도시들을 전부 손에 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또한 페르시아와 이라크,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엄청난 무슬림 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사기를 저하시키라는 임무를 띤 첩자들이 비잔티움과 프랑크의 일반 전사들 틈에 잠입했다.- P185
누르 알 딘은 선전선동을 몸소 관장했다. 그는 시와 서신, 책을 쓰게 하였으며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만한 적당한 때를 골라 퍼뜨리게 하였다. 그가 설파하는 교리는 간단했다. 단일 종교, 곧 이슬람 수니파로서모든 ‘이단들‘에 맞서는 격렬한 싸움을 의미하였다. 이어 단일 국가. 이것은 프랑크인들을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단일 목표. 이것은 빼앗긴 땅을 되찾고 특히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지하드를 의미했다. 권좌에 머무른 28년 동안 누르 알 딘은 여러 울라마들을 부추겨 조약을 쓰게 했고, 이슬람 사원들과 학교에서는 대중 강독- P208
집회를 통해 성지 알 쿠드스의 가치를 선전하게 하였다.- P209
누르 알 딘은 승리자다운 아량으로 아바크와 그 측근들에게 홈스지역의 봉토를 하사하였으며 그들이 재산을 갖고 피난하는 것도 허락했다.
전투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누르 알 딘은 무기가 아닌 설득- P221
으로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4반세기 전부터 아사신이건, 프랑크인들이건, 장기이건 간에 자신들을 예속하려는 누구에게나 격렬히 저항해 왔던 이 도시는 안전과 자주성을 존중해 주겠다는 한 왕자의 너그러움에손을 들고 만 것이다. 다마스쿠스인들은 그 점을 후회하지 않았다.- P222
살라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작고 가냘픈 몸에 단정하게 수염을 길렀다고. 그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살라딘은 사색적인 표정에 약간은 침울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졌다고 한다. 그는 늘 손님에게 상냥했다. 음식을 자꾸 권했으며 그들의 요구는 되도록 들어주려 했다. 비록 불경을저지른 자들일지라도 모든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실망스럽게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그의 이런 성격을 때로이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P255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 금은보화가 탐이 나서도 아니요. 복수 삼아 한 일은 더더욱 아니라고 했다.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다만 신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무에서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살라딘이 거둔 승리의 의의는 성지를 침략자 무리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뿐 아니라, 피와 파괴를 동반하지 않고, 증오 없이 행해졌다는 데 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무슬림은 기도를 드릴 수 없었을 이 성지에서 무릎을꿇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라딘은 흡족할 따름이었다.- P284
아크레, 아스칼론, 또는 예루살렘 등 도시나 요새를 점령할 때마다살라흐 알 딘은 적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티레로 망명하는 것을 허락했다. 현실적으로 이 도시를 완전히 함락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불구하고 말이다. 연안 지대의 프랑크인들은 바다 저편에 있는 자들에게 연달아 전령을 보냈고 이들은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살라흐 알 딘이야말로 자신의 군대에 대항하는 방어군을조직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P288
사실 성지 예루살렘은 알 카밀의 세력권에 있지 않았고 얼마 전에 사이가 틀어진 동생 알 무아잠의 수중에 있었다. 알 카밀은 자신의 벗인 프리드리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서 알 무아잠의 야심을 저지하는 완충국을 건설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길게 보면 다시 힘을 회복한 예루살렘이 이집트와 그 위협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아시아의 호전적인 전사들(몽골을 말함-옮긴이) 사이에서 효과적인 중재역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열렬한 무슬림이라면 결코 냉정하게 성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겠으나 알 카밀로 말할 것 같으면 백부인 살라딘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무엇보다 정치적이자군사적인 사안이었다. 종교적 입장은 여론을 상대할 때에나 고려할 문제였다. 한편 스스로를 그리스도 교도도, 이슬람 교도도 아니라고 느끼고있던 프리드리히도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였다. 그가 성지를 탐냈던 것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묵상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동방으로의 출발을 늦춘다고 자신을 파문한 교황과의 싸움에서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P320
당시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을다스리고 있던 아이유브 왕조의 소국 왕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칭기스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침략자들과 손을 잡아서 왕조의 적이기도 한 이집트 맘루크들과 대적할 생각을 할 만큼 정신 나간 자들도 있었다. 서유럽과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들의 입장도 가지가지였다. 하이톤이 통치하던 소아르메니아는 몽골인 편을 들었다. 하이톤의 처남이었던 안티오케이아의보에몽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아크레의 프랑크인들은 오히려 무슬림 쪽에 유리한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은 물론 동방에서도- P339
몽골 군의 원정을 프랑크인들의 원정처럼 무슬림에 대항하는 일종의 성전으로 보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P340
아크레를 정복하고 나자 신께서는 시리아 연안에 아직 남아 있던프랑크인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심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이다와 베이루트, 티레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도시들에서도 서둘러짐을 싸기 시작했다. 술탄은 그 어떤 술탄보다도 좋은 운을 타고난사람이다. 그 지역을 그처럼 수월하게 정복해서 즉각 파괴시켜 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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