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이슬람교도는, 투르크인이든 아랍인이든 이집트인이든, 어느 지역 출신이건 상관없이 서유럽 사람을 전부 ‘프랑크인‘이라고 불렀다. 또한 비잔틴제국의 백성인 그리스인은 ‘로마인‘이라 불렀다. 비잔틴제국이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로마제국으로 칭해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프랑크인‘이라는 호칭은 대충 정한 것으로 보여도 꽤 적확한 총칭이었다. 사실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유럽인‘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유럽‘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유럽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84
지금까지는 계속 길잡이라고만 쓰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제후들의 십자군이 소아시아를 답파할 때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에게는어엿한 이름과 지위가 있었다. 이름은 타티키오스, 지위는 그리스군사령관 중 한 명. 즉 황제 직속의 가신이다. 이 타티키오스가 황제 알렉시우스의 뜻을 받들어 행동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일이었다.- P104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에도 그곳이 계속 그리스도교 도시로 유지되려면, 북쪽에 있는 안티오키아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교 쪽에 있어야한다. 그리고 이 안티오키아를 이슬람측의 반격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북동쪽에 위치한 에데사까지 그리스도교 도시로 만들면 전략적으로 만전을 기하는 체제가 이루어진다. 더구나 그로 인한 이점은 즉각나타난다. 안티오키아를 공격할 때 십자군의 배후가 안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P110
로마에서 열 수 없어서 대신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가 제창한 십자군이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우르바누스의 제창에 호응한 제후들의 군대가 이제 실제로 오리엔트에 도착했다. 성도 예루살렘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지만 서유럽이 모두 들고일어나 출발한 그리스도교도 군대가그들의 성지인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받은 충격은 컸다. 이것은 모두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