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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케네디 행정부는 공산주의가 남쪽을 잠식해 들어온다는 생각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또한 전임 정부들에 비해, 급진적 정치 운동이 성공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빈곤과 사회 부정의라는 것을 훨씬 잘 알았다. 쿠바 코치노스만 침공을 단 몇 주 앞둔 1961년 4월, 미국의 젊은대통령은 라틴아메리카와 함께 이른바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Progress)‘을 시작했다. 발전과 경제원조에 초점을 맞춘 10개 사업을제시하고, "독립을 위협받는" 어떤 나라든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케네디의 계획은 10년 안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빈곤을 추방한다는 것이었다.- P494
이런 사업 가운데 가장 성공을 거둔 분야-교육, 보건,
교통, 주거는 배타적이지 않고 개방된 미국, 상호 이익을 위해 라틴아메리카 동맹국과 기꺼이 협력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진보를 위한 동맹‘의 긍정적인 측면은 지역 전체에서반민주적인 군사정권을 기꺼이 지지한 미국의 태도 때문에 무색해졌다. 애초에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군사 원조가 ‘동맹‘ 계획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케네디의 후임인 린든 존슨이 통치하면서 ‘동맹‘의반란 대응 측면은 종종 민간사업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P495
쿠바 바깥에서 소련은 라틴아메리카 냉전의 주요 참여자라기보다 적극적인 방관자에 가까웠다. 소련은 각국 공산당 및 그들이 참여하는 전선과 동맹 [칠레 아옌데의 인민연합(Unidad Popular) 등]에 자금을지원하고 조언했다(때로는 환영받았지만, 때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도 국가보안위원회와 정보총국 요원을계속 두었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현지의 사태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모스크바에 보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유리안드로포프Yurii Andropov는 라틴아메리카 주재 공작원에게 이렇게조언했다. "주요 과제는 사태의 흐름을 자세히 살피면서 현지의 상황과 세력들의 상관관계에 관한 다면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확보하는것입니다."29 소련은 언제든 곧바로 사태의 추이를 조종하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리와 우선순위,
상대적 힘의 균형 때문에, 냉전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모스크바의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P507
라틴아메리카의 냉전은 외부보다 내부에서 벌어졌다. 일부이긴 하나 정치적으로 훨씬 더 극단을 달리는 우파와 좌파의 점증하는폭력적 충돌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우파와 좌파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복잡한 범주다. 좌파에는 몬토네로스 부류의 악랄한 선동가와 살바도르 아옌데 같은 지조 있는 개혁주의자가 있었다. 이 두 방향 사이의 분열은 냉전 후기에 점점 깊어졌다. 우파도 분열이 심각했다. 일부는 그저 자기들 몫의 거대한 돈과 자원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다- P509
른 이는 종교와 민족 개념에 이데올로기적으로 깊이 몰두했다. 그리고 일부-특히 남쪽의 원뿔(Southern Cone) 지역의 소규모 중간계급-는 미국을 정치와 사회의 조직화 면에서 직접 영감을 주는 나라로 여겼다.
다른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정치적 경향에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군사 독재의 등장은 그들이 흔히 선언한 것과 달리, "민족적 통합이 아니라 파편화의 증대를 의미했다.- P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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