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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의 서재

기억 행위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나 증인의 죽음, 일상성의 지배라고 하는 자연스러운 망각의 요인에서 유래하는 것이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다시 죽은 자들의 의지와 그 ‘작품‘을 횡령하고자 하는 역사편찬= 역사서술의 폭력도 다른 기억, 다른 해석,
다른 이야기에 의한 사후적인 폭력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바야흐로 기억되어야 할 사건 그 자체가 애초부터 기억에의도전으로서, 망각에의 덫으로서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기억에 대립하는 다른 기억, 해석에 대립하는 다른 해석, 이야기에 대립하는 다른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기억 그 자체의 부정, 해석 그 자체의 부정, 이야기 그 자체의 부정의 형태로 발생하며 거기서는 모든 것의 ‘변호‘ 불가능성이 사건의 핵심을 구성한다.- P10
‘완전한 망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현재는 망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말해진 적이 없었던 몇몇 절멸이, 기억된 적이 없었던 몇몇 재액(쇼아)이 있었을지도모르는 것이다."- P49
‘인종으로의 민족의 몰락‘이란 기억의 관점에서 말하면 실제로는 기억의 무화이고 어둠 속으로의기억의 전략인 것인바, 그런 기억의 어둠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아프리카‘이고 ‘암흑의 핵심‘으로서의 블랙 아프리카이기 때문이다. European mankind의 붕괴, ‘서양의 몰락‘은 아렌트에게는 유럽의 아프리카화로서 표상되고 있는 것이다.- P102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우리가 되는 나, 나가 되는 우리lch, dasWir, und Wir, das Ich ist"로서, 인륜적 공동체와 개인, 보편자와 개별자,
전체와 개체를 총합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실재로서의이성의 자기 확신이 ‘진리‘로까지 고양되고, "자기 자신을 세계로서,
또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정신의 운동이란 세계의 운동에 다름 아니고 역사 그 자체와 일치하는것이 된다. ‘정신의 상처는 상흔을 남기지 않고 아문다‘는 단언은 그러므로 동시에 역사철학적 테제이다. 그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행위도그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도 역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부정성‘의 기억- 역사의 ‘상흔‘은 정신의 힘을 통해 ‘소멸‘ 시킬 수 있다는 것이 여기서 피력되고 있는 확신이다.- P145
레비나스를 원용하자. "우주 전체를 창조하고 떠받치는 신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신조차도 희생자를 대신할 수 없다." 희생자가 짊어진
‘현실의 상처‘가 죽음일 경우에, 달리 말해 용서할 권리를 가진 ‘행위의 유일한 희생자‘가 처음부터 죽은 자일 경우에 가해자가 용서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바, 만일 신이 그것을 용서한다면, 즉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하거나 죽은 자들에게 덮씌운 악이나잘못을 아무 것도 아닌 것, ‘무와 같은 것‘으로 하여 ‘기억‘ 속에서
‘제거해‘ 버린다면, 그것은 신에 의한 역사의 개찬, 곧 신의 리비저니즘revisionism, 역사수정주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153
역사의 ‘가시적인 것‘ 아래의 ‘비가시적인 것‘을 보는 심판,
그럼으로 인해 ‘역사 그 자체가 심판받는 것과 같은 심판은 ‘주체성의 고양‘을 요구한다. ‘타인‘은 ‘나를 응시하고, 나를 고발하는재이므로, ‘응답하도록 나를 독촉하는 한에 있어서, 심판은 나에게내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독촉은 ‘무한책임을 짊어지라‘는 촉구에 다름 아니다.- P174
"국가에 맞서 유지되는 자아의 대체불가능한 유일성은번식성에 의해 성취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이것은 즉, ‘아버지의 유일성‘이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유일한 아들‘을 낳고, 이리하여 "아버지의 아들은 모두 유일한 아들이자, 선택된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아들‘도, ‘타인‘에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각각이 유일한 ‘증인‘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번식성‘이란 바야흐로 무수의 ‘유일성‘을 낳는 ‘유일성‘인 것이고,
‘유일성‘의 ‘무한‘ 반복인 것이다.- P181
로젠츠바이크에게 ‘영원의 민족‘은 ‘그 피의 순수한원천을 다른 피와의 혼합fremde Beimischung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신의 이스라엘‘이역시 이 ‘혼합‘을 기피하고 있는지 아닌지, 어디까지 기피하고 있는 것이지는 알 수 없다. 이미 살펴보아 온 바와 같이, 레비나스는
‘아버지의 공통성‘이 있는 한 ‘모든 인간은 형제이다‘는 입장에 서있다.- P193
‘새로운인간 전체‘는 언제나 좁은 뜻의 ‘이스라엘‘ 즉 유대민족에서 출발하고, 그러한 좁은 뜻에서의 ‘이스라엘‘에서 넓은 뜻에서의 ‘이스라엘‘로 확대되는 형태로서만 논의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유지하시오‘"라는 명령은 우선적으로 좁은 뜻의 ‘이스라엘‘
‘인간은 유대인으로 태어난다‘고 한다면, ‘생물학적 번식성‘을 기초로한 ‘번식성‘의 공동체의 방위를 요구하는 것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P194
만신창이의 증인들. 다가오는 ‘늙음‘과 ‘죽음‘의 폭력에 대항해
‘역사의 심판‘의 ‘잔혹함‘에 대항해 증언할 ‘그녀들‘의 목소리는
‘부성‘에도, ‘모성‘에도, ‘가족‘에도, ‘민족‘에도 ‘일신교‘의 ‘형제- P194
관계‘에도 회수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남자‘(후카츠 목사)에 의한
‘박해‘의 기억, ‘국가‘와 ‘영웅적인 주체‘에 의한 ‘박해‘의 증언은
‘모성‘이나 ‘민족‘이나 ‘번식‘에 회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박해‘는 ‘번식성‘의 파괴, ‘모성‘의 파괴, ‘민족‘의 파괴였지만,
또한 동시에 또 하나의 ‘민족‘의 또 하나의 ‘모성‘과 ‘번식성‘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박해‘ 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그녀들‘을 침묵으로 몰고 간 원인의 하나가 ‘가족‘이나 ‘민족‘이나 ‘번식성‘의 무언의 압력이었다는 사실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P195
고야마 언설의 아포리아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스스로 문화 그 자체의 발전의 본질적 조건으로 인정했던 것을 이번에는 ‘문화그 자체의 사멸‘의 조건으로 지정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언설은 문화의 텔로스-‘합일‘를 문화의 에이도스 ‘거리‘에 반대하여 문화의 에이도스의 폐기로 규정하길 원한다. 이런 의지를 이끄는 것이 일본의 ‘세계사‘적 역할을 그 ‘국민정신의 독자성‘으로부터, 즉 ‘국체의 독자성‘으로부터 정초하려는 욕망이었음은 이미 분명할 것이다.- P224
‘세계사의 철학‘의 반제국주의 논리는 실제론 그 철학의 ‘제국주의적‘ 귀결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계의 재블록화와 세계정치로의 ‘대국‘ 일본의 재등장이 운운되고 있는 오늘, 그 ‘선견성見性‘을 ‘제국주의적‘ 일탈로부터 구별하여 구해낼- P236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계사의 철학‘은 바로 그것이 내걸었던 제국주의 비판의 원리, 즉 ‘각 민족 각 국가가 제각기 그 자리를얻는다‘는 ‘도의적 원리‘에 의해 세계사를 자기 것으로 한다. 자기로의 회귀를 비판함으로써 자기 쪽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P237
일반적으로 다원주의는 다수인 ‘원元, 으뜸. 시작. 본래 • 기원‘ 그 자체의 동일성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삼는다. ‘특수적세계사‘의 ‘다수성‘을 설파하고 각 민족 각 국가가 자리를 얻은‘
다원적 세계의 실현을 설파하는 ‘세계사의 철학‘이 일본의 ‘국민적동일성‘을 ‘순수‘한 ‘피‘의 ‘동일성‘으로 전제했다고 해서 그것이별달리 기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고야마는 그 ‘동일성‘
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당시의 황도철학이나 황국사관의 편협한 일본주의를 암암리에 비판하고 ‘국사‘를
‘세계사적 입장‘에서 봐야 한다고 강조할 때에도, 일본의 ‘세계성‘
이란 결국엔 과거에 대해서도 미래에 대해서도 ‘외국문화‘의 ‘이식‘
을 통해 사고되고 있을 따름으로, ‘피‘의 ‘동일성‘ 그 자체는 언제나 불변하는 성역으로 전제되어 있다. 물론 그러한 ‘피‘의 ‘동일성‘
및 그것에 관한 확신이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은말할 것도 없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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