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신문을 보고 이 전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는 전시는 2월 중순에 마무리되어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아무래도 가보기 어려울 것 같아 다음 날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섰다.
수묵화를 잘 알지 못하지만 보고 있으면 편안함을 느낀다. 먹의 농담만으로 다양한 표현을 해내는 수묵화는 어느덧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되었다. 거기에 채색을 더하면 화려한 수묵채색화가 된다.
이번 전시는 제목처럼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 수묵 화가들의 작품들을 총 148점 만날 수 있다. 한국의 근현대 수묵(채색)화는 종종 전시에서 만났지만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경험은 결코 흔하지가 않기 때문에 가기 전부터 무척 흥분되었다는 사실^^
한국과 중국은 고대부터 같은 문화권 내에 자리하여 공생하여 왔다. 그러나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두 나라의 문화를 전시품들을 만나면서 더욱 잘 느끼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한국 작품은 근대를 대표하는 수묵채색화가들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대 한국화가의 작품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중국 작품은 자오즈쳰, 우창숴, 치바이스 같이 중국 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있는 작가 뿐 아니라 현대까지도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이했던 것은 중국 현대 작가는 직업 화가이면서도 교편을 잡고 있거나 미술관 관장인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근대 시기 한국은 기존에 사용하던 ‘서화’란 호칭 대신 글씨와 그림을 분리하여 붓과 종이, 먹으로 그린 그림을 ‘동양화’라 부르기 시작했다. 일부 그림에서는 서양 미술의 영향으로 원근법과 명암법이 적용되어 서양적 색채를 띠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 그림에서는 전통을 고수하거나 동서양의 기법을 융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도 안중식의 <백악춘효>를 볼 수 있었다(벌써 3번째 정도 보는 것이어서 너무나 익숙해진 그림). 봄의 새벽이라는 제목과 달리 그림은 여름과 가을에 그려진 것이다. 이번에는 여름본이 걸렸는데 가을본에는 백악산이 왼쪽으로 치우치고, 오른쪽의 해태상이 보이지 않는다. 1915년 그려진 그림으로 이 시기가 되면 경복궁의 전각들이 철거당하던 때여서 작가는 기억과 사진에 의존하여 그렸다. 실제보다 경복궁을 더 크게 부각하여 작가의 숨은 의도를 엿보게 한다.
1930년대에 오면 수묵은 ‘산수’를 주로, 채색은 ‘인물’을 주로 표현하게 된다.
이용우의 <점우청소>도 그런 대표적인 그림들 중 하나다.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으로 뒤의 산은 흐릿하게 표현하고 앞의 나무와 강둑은 세밀하게 표현하고 진하게 표현하여 대비를 주었다.
채색 선면화는 부채 모양에 아름다운 수묵채색화가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작은 공간에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는 것이 놀랍다. 작가마다 추구하는 미학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1950년대가 되면 모더니즘의 열풍으로 동양화에도 추상 양식이 차용된다.
<구월>은 포도넝쿨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가슴을 드러낸 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보자마자 구릿빛 피부에 건강함이 느껴졌다. 배경이 포도라서 그런지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장운상은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부를 1기로 졸업한 뒤 평생토록 동양화를 그린 작가다. 이 그림은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기도 하다.
오태학의 <전우>는 군에 입대해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1961년 그림으로 얼굴 표정을 볼 수 없지만 인물들의 동작만으로 당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다양한 면으로 입체감을 표현하여 사실화이면서도 추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기창의 <군마>(1955)는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말 다섯 마리가 하나도 같은 모양이 아닐 정도로 각기 다른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말의 기상처럼 우리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일까.
1960~1970년대에는 국가적으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정책의 일환으로 민족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는데 이는 미술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생활 속 일꾼들의 모습이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경을 그린 산수화가 다시 유행하였다.
안상철의 <영 62-2>(1962)은 이런 것을 그림이라고 할 수 있나 할 정도로 파격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전시회 내 같은 공간에서도 한 눈에 차별성을 엿볼 수 있어 단번에 눈에 띠었다. 이 작품은 총 3개의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맨 위 화면과 중간에 설치된 목판, 바닥판이 있다. 맨 위층과 중간층에 돌들을 배치해 놓고 화면의 아래쪽을 가로로 길게 찢어서 그 틈을 통해 중간의 돌들을 볼 수 있게 한 구조다. 그래서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적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영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의미로 <영> 시리즈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에는 한국적인 소재와 현대 미술 양식을 접목하여 동양화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이끌기 위한 많은 작가들의 노력이 이어졌다.
원문자의 <정원>(1976)은 선염법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 여백이 거의 없는 것이 눈에 띄고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자연의 풍경을 포착하여 집에 들여온 것 같은 느낌이다.
박생광의 <제왕>(1982)은 불교적 색채를 느끼게 한다. 박생광은 민족회화를 탐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만들어나갔다.
석철주의 <외곽지대>는 도시 외곽의 산등성이나 산비탈 같은 높은 지대에 밀집한 판잣집 달동네를 그려서 당시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당시 상황을 확인하게 한다. 재료가 너무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장판지에 먹을 입힌 그림이라고 한다.
송수남의 <붓의 놀림>(1997)은 한국 현대화 중 내가 가장 오래도록 머물렀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송수남이 현대화에도 수묵화가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추상 수묵화를 연작으로 발표한 그림들 중 하나다. 지필묵만으로 이렇게 현대적인 그림을 나타낼 수 있다니 볼수록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현대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2024년 불과 작년에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그림이다.
이진주의 <볼 수 있는 21>. 이 그림의 독특성은 흰 배경이 아니라 검은 배경이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2017년부터 이런 블랙페인팅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저마다의 인식 체계 속에서 다르게 풍경을 인식한다. 작가의 의도도 이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연작은 광목천에 아교를 발라서 바탕을 만들고 물에 부푼 채색 물감을 사용해 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의 잔털까지 보일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중국의 전통 수묵화는 예술로 역사와 시대를 표현하고 사회와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자연과 인간을 함께 표현하거나 시화로 미학성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문화만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자오즈첸은 청나라 말, 이름을 날렸던 예술가이다.
<화훼>는 서예와 전각을 접목한 화조화다. 강렬한 먹선으로 바위를 강조하고 외곽선을 살려서 사물을 더 입체감 있게 나타내었다. 뒤쪽에 해당화가 그려져 있어 바위와 함께 고풍스러운 기상을 느끼게 한다. 사실 자오즈첸이 유명한 것은 금석화파의 창시자여서이기도 하다. 서예와 전각, 그림이 무척이나 조화롭다.
우창숴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가로 중국 근대화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학자 집안에서 자라 서른 살 무렵에야 직업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구슬 빛>(1920)은 등나무를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데 언뜻 보면 그냥 먹을 대충 벅벅 그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또 저런 붓질이 없었다면 그림에 생동감이 덜했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호쾌하면서도 자유로움이 엿보이는 그림이었다.
사실 앞서 소개한 자오즈첸과 우창숴보다 내게는 치바이스라는 이름이 더 각인되어 있다. 치바이스는 20세기 중국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래서 치바이스의 그림을 한국에서 볼 수 있다니 그저 감격스러웠다. <연꽃과 원앙>(1955)에는 두 마리의 원앙과 연꽃이 표현되어 있다. 연꽃과 원앙의 그림을 다른 기법으로 표현하여 마치 두 개를 다른 사람이 그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먹과 채색만으로 이런 풍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놀라웠다.
판제쓰의 <석굴 예술의 창조자>(1954)는 둔황석굴을 표현하였다. 화려한 뒷면의 석굴 그림과는 다르게 앞에 그려진 화가와 후원자들은 간소화하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현대로 가면 국가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그려진다. 최근에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예술 표현을 확장하는 데 주목하게 된다.
라오빙슝의 <자조>(1979)는 항아리를 깨고 나왔지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표현했다. 예술과 자유는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자유를 빼앗겨 억압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해학적인 묘사 속에서도 서글픔이 느껴진다.
천다위의 <끓어오르는 마강>(1960)은 중국 산업현장인 마강(당시 철강 기업 이름)의 건설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분주한 산업 현장의 인부들과 건설 현장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산업 현장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양즈광의 <광산의 새로운 일꾼>(1972)은 여성 광부의 모습을 표현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양화의 기법을 활용해 화려한 색채감으로 인물을 강렬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해내고 있다. 배경은 간결하게 표현한 데 반해 여성 광부인 인물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물을 부각시킨다. 인물은 마치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후밍저의 <영원>(2008)은 암채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이다. 암채화는 천연 광물로 만든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도 다양한 색상의 암석을 갈아 알갱이로 만들고 알갱이를 접착제와 혼합하여 안료로 사용하였다. 광물성 안료는 색이 깊으면서도 오래 보존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암석들 사이에서 중앙에 하늘색 공간이 눈에 띠는데 마치 빠져 들고 싶을 만큼 깊숙한 공간감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류윈취안의 <넓은 마음으로 바라본 세계>(2018)은 제목에서 일단 눈길이 가고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한 그림에서 관객을 또 한 번 집중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글씨에 주목하시라. 여백의 미를 강조하여 인간의 좁은 시선을 넓은 시야로 확장하라는 작가의 주문을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현대 작품들 중 가장 오래 시선을 머무르게 한 작품이었다.
총 3시간을 넘게 들여 전시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허락한다면 5~6시간을 봐도 모자르다라는 생각이 들만큼 좋았다. 다만 전시 도록을 사려고 했더니 품절이라고 해서 좌절했다. 아니 전시에 도록이 없다니 너무하잖습니까. 2월 중순에 전시가 끝나는지라 또 보러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또 한 번 더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