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차별과 성적인 차원의 거리두기는 반드시 지켜야 할 식민 정책의 근간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성차별이 인종차별과 함께 행해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위계 질서는 인종적 우월성과 식민 담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지배 담론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피치 못하게 인종 간의 성적 결합이 발생할 경우에는 양자간에 인종적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는데 그 상황에서도 오직 백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의 결합만은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밖에 다른 형태의 인종 간 성적 결합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영 제국의 식민 체제를 가장 대표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특징은 남성다움이 된다. - P47
기대했던 것보다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특히 나는 1장과 5장에서 얻은 바가 많았다.
1장에서는 인도 항쟁이 영국 제국주의와 결합했을 때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 알려준다.
우선 ‘인도 항쟁’이 아닌 ‘세포이 항쟁’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내게 사건의 이름조차 새롭게 다가왔다. 19세기 후반 강하고 정력적이고 냉철함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영국 제국의 남성성은 제국주의와 함께 식민 통치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영국 제국 초기였던 183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인들은 식민지의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예를 들면 유럽 남성이 원주민 여성과 결합하는 것을 종용하기도 했는데 이는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식민 정책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물론 이는 식민지 입장에서 보면 제국주의적 시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1830년 이후가 되면 동인도 세력의 힘이 떨어지고 기독교의 선교가 확장되면서 영국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를 바탕으로 개혁의 바람이 분다. 거기에 식민지의 경제적 수요가 증가하고 인도의 지정학적 가치가 더해지면서 인도의 수탈은 강화되었고, 식민 정책이 강경하게 바뀐다. 인도 항쟁은 강경 식민 정책으로 돌아서는 데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건이라도 사건 자체로만 이해하면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 전후 사정의 과정을 이해하고 주변을 확인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단편적인 시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인도 항쟁(세포이 항쟁)을 더욱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5장은 영국이 추종하는 ‘신사’에 대한 개념에 대해 더 깊숙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막연히 영국의 신사하면 떠오르던 외양이 있었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신사는 퍼블릭 스쿨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 퍼블릭 스쿨의 시스템은 질서를 중시하고 계급적 위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차별 구조를 정당화하였고 이런 엘리트주의를 이용하여 배타성을 키웠다. 거기에 스포츠맨십을 이용하여 남성성을 더 강화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퍼블릭 스쿨이 고대의 이상인 현인과 중세의 시사적 영향을 이어받은 인간상을 만들어내려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퍼블릭 스쿨은 이렇게 배타적인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냄으로써 영국 제국주의의 기초가 되는 남성들을 만들어냈다.
6장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의 인물들을 통해 영국인이 바라는 신사의 개념을 들여다본다. 소설을 읽지 않고 6장을 읽었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급하게 <위대한 유산>만 읽었다. 사실 <위대한 유산> 뿐 아니라 <데이비드 카퍼필드> 소설도 다루기는 하지만 <위대한 유산>만 읽어도 6장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다. 물론 가능한 소설을 읽고 6장을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만약 내가 6장의 내용을 읽지 않았다면 ‘신사’에 집착하는 어떤 남성의 성장기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 같다. 신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인지 곱씹게 해주는데 과연 당시 영국의 신사들이 도덕성과 인격을 갖추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애당초 주인공이 모델로 삼은 신사는 허울 뿐인 외양과 자본을 갖추었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소설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제국주의의 첨병을 달려 가던 영국의 환경을 들여다보게 하면서 식민지/피식민지민 간에 계급적이고 위계적인 차별 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시간 내에 읽었다면 더 흡입력 있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요즘 일이 너무 몰려서 일정상 후반부에 몰아 읽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영국의 식민 전략은 인도에 있는 영국인들에게 식민 통치에 부합하는 제국주의자가 되도록 강요하였다.- P40
표상은 다양한 권력 속에서 만들어지고, 인지되며, 해석된다. 따라서 타자의 몸에 대한 담론은 결국 그 몸을 통해 <보고자 하는 것>이수반하는 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유추하고, 추출하여 정립하기 위해 한 시대의 합리적 방식, 즉 이른바 <과학적 방법들이 적용되었다. 여기서 19세기의 <과학>이 <타자의 몸>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을 띤 가치를 몸에 투영하기 위해 당시의 과학을 <동원>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P92
영국인들은 인도인에 대한 보복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도 항쟁기에 일어난 <여성들과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이용하여 <집안의 천사>라는 개념을 더욱 강화시켰다. 여성들은 폭도들의 위협을 받는 영국적인 가치의 상징이자 비유의 핵심으로 강조되었고, 영국 남성들의 기사도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제국의 한가운데 놓인 빅토리아 시대의 <집안의 천사>는 무언의 상징적 중심이었을뿐 그 자체로는 적극적 역할을 전혀 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의 사회와 가정의 가치를 의미하는 허구적인 표상으로 기능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가혹한 제국주의의 정책들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작용했다. - P154
19세기는 고대 그리스 문화와 중세 문화를 이상화하면서 흠뻑 젖어들던 시기였다. 고대의 이상과 중세의 영향이 가장 집약되어 녹아든 곳이 퍼블릭 스쿨이었다. 그곳에서는 그리스어를 비롯한 고전교육 위주의 커리큘럼과 스파르타식 교육, 중세의 기사도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고전 교육, 설교, 독서, 교과서 등을 통해 남성들 사이의 우정 혹은 애정을 미화하는 내용을 늘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소년들로만 이루어진 퍼블릭 스쿨은 남성만으로 이루어진 중세 수도원의 형태와 가장 근접한 곳이었기에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한 수도사나 독신 사제의 금욕에 대한 예찬이 이곳에서도 강하게 주입되었다.- P208
퍼블릭 스쿨은 엄격한 위계와 의식화된 코드, 계율과 질서의 총본산이다. 19세기의 많은 퍼블릭 스쿨에서는 상급생이 하급생을 지도하고 관리, 감독하는 프리펙트패깅 시스템 prefect-fagging system이라는 조직 체계를 운영하였다. 프리펙트 prefect나 프리포스터(preposter, praeposter)는 상급생 가운데 선발된 감독생을 일컫는 말인 반면, 상급생이 부려먹는 하급생은 흔히 패그fag라고 불렸다.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퍼블릭 스쿨에서 상급생과 하급생의 관계, 나아가 프리펙트-패깅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엄격한 위계 질서를 체화하게 만드는 환경을 제공했다. - P213
1857년 10월 4일 안젤라 버뎃 쿠츠Angela Burdett Coutts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킨스는 대량학살에 대한 충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인도의 최고사령관이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할일은 그 동양 인종을 불시에 습격하여, (....) 그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 최근에 자행된 잔혹한 행위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인종을 근절시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 내가 그곳의 책임자라면, 다양한 처형 방법을 강구해 그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 한시 바삐 인류에서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 P238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는 『문화와 제국주의 Culture andImperialism』에서 『위대한 유산을 논의하면서 『데이비드 카퍼필드』와 달리 이 소설은 식민지로의 추방이 가졌던 <영속성>을 사실상 위반하며,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매그위치의 영국 귀향을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이드는 <갱생을 위해 설계되었으나, 이송되었던 영국 범죄자들의 본국 송환은 사실상 금지되었던 형벌 식민지였다>)고 오스트레일리아를 설명한다.
매그위치의 귀환에 대한 금지령은 단순히 형벌의 의미가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것이다. 국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장소로 이송될 수 있지만, 디킨스의 모든 소설이 입증하듯 모국의 개개인들이 만들어낸 계급조직이 철저하게 도식화하고 확보하여 이미 구성원들이 거주하고 있는 모국의 공간으로 ‘귀환‘이 허락될 수 없었다. - P262
핍은 영국 남성성의 다양한 정의에 관해 고심하면서 자신이 <신사>에 대해 최초로 내렸던 정의, 즉 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신사는무책임하고 파산 상태에 빠진 상류층 젊은이로서, 좀처럼 존경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 소설 끝부분에 이르면 핍은 실제로 경제적 능력과 상관없이 심정적으로는 진정한 신사이다. 막연한 상상이 점차 현실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핍은 자신이 속한 영국 사회가 물질적인 것, 특히 식민지 자본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