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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외의 서재
  • 진주
  • 장혜령
  • 13,500원 (10%750)
  • 2019-12-27
  • : 1,337

이 책은 어떤 책일까. 


이 책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당신’)에 대한 책이 아니다. 

‘당신’은 2인칭으로 호명되지만, 단지 ‘나’ 혹은 ‘딸’이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인 것이다. 

‘당신’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의 주인이 이 책의 주인이다. 


그 눈은, 단일하지 않다. 

친구가 되어 바라보기도 하고, 딸이나 어머니가 되어 바라보기도 하고, 죽은 이가 되어 바라보기도 하고, 

광장과 거리에 서있는 망연한 개인이 되어 바라보기도 하며, 

심지어 때로는 카메라 렌즈처럼 풍광 어딘가에서 익명의 존재가 바라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양한 눈이 존재하기에, 다양한 시점이 가능하고, 다양한 시공간이 드러나게 된다. 

1970년대 독재정권 하의 한국, 2010년대의 번듯하나 황폐한 서울, 어린 시절 접한 우화들, 위인전 속 인물들, 

내가 보았으나 보지 못한 유년의 풍광, 내가 알고 있으나 전혀 모르는 아버지의 유년…… 


이 책이 영화적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소제목 처리된 * 표시를 기준으로 전후의 맥락이 분절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도약하며 연결된다.

날아오르는 흰 새, 눈물 흘리는 여성 등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장혜령 작가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시각성을 기반으로, 그 유사성과 이질성, 보편성을 기반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는 ‘네시이십분 라디오’ 79회에서 자신의 작품인 <진주>의 쓰기 방식에 관해 작가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연결’과 ‘도약’은 오로지 작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주관성의 영역이나, 

바로 그 ‘연결’의 시도를 통해 독자들은 당연시하던 것들을 의문하게 된다.

가령,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앞에 울던 여성들의 모습과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울던 여성들의 모습이 닮아 있다.

두 이미지는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유사한가?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는 두 이미지를 작가가 병치시킴으로써,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건넨다.

이것이 한국 역사인가? 를, 과연 무엇이 다른가? 얼마나 변화하였는가? 를. 

<진주>는 무언가를 주장하는 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되)묻는 책이다. 


단일한 서사로 흐르지 않는 소설이, 

소설이란 무릇 단일한 서사를 지녀야 한다는 관습에 저항하는 ‘소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역사를 실증하기 위해, 이른바 ‘대문자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쓰이지 않았다.

폭로하기 위해, 선언하기 위해서였다면 이 책은 지금과 같은 다층적 층위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 대의, 명분, 동지, 연대 등 거대한 당위의식과 의무감과 도덕으로 인해

가려진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숨겨진 것들, 없는 것처럼 여겨져온 것들을 (가령 ‘개인적인 삶’처럼) 

조심스레, 내밀하게, 고요하되 빛나는 눈으로, 꺼내 놓는 책이다.

자신이 직접 통과해온 생을 적었기에 진실하며, 용감하다.


한 곳에 붙박여 있으며 가지를 무한한 방향으로 뻗는 나무를 생각한다. 

그 나무는 움직일 수 없지만, 뻗은 가지들은 다채로이 휘어지고, 늘어지고, 갈래를 뻗는다. 

뻗은 가지에서 다시 잔가지가, 잔가지에서 다시 새 잎이 돋아난다. 

그러한 무한한 생의 순환을 보는 것 같은 경이가 장혜령 작가의 책 속에 들어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그 도약을, 

움직일 수 없는 - 어딘가로 쉬이 떠날 수 없는 - 한 사람이 펼쳐보이는 수 갈래 이야기들이 뻗쳐 나오는 힘을 느낀다. 


단지,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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