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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씩은 현실의 무게가 삶을 압도해 올 때, 스스로가 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지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은 나를 응시하고, 나 역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 응시하는 두 시선이 날카롭게 마주하여 부딪힐 때, 비로소 진실이라는 녀석은 그 진정한 실체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김하경의 연작 소설집 <숭어의 꿈>(갈무리 刊)은 그러한 진실을 아주 강렬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응시하는 시선이다.

빠른 템포로 숨가쁘게 읽어 내려가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났을 때, 머리에 스치우는 생각은 ‘반가움’이다. 이제는 도서관의 외진 구석에서 희뿌연 먼지 아래에서 화석화되어버린 채로 지나간 과거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 ‘노동소설’이 그 생생한 현재진행형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가움인 것이다. 우리들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를 가로지르며 들불처럼 번져갔던 그것의 존재를 너무 쉽게 잊고 지냈던 것 같고, 이제는 시효 만료된 그 무엇이라고 암암리에 여겨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우리들에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는 듯이 노동현장을 향해 날카로우면서도 은근하게 시선을 보내며, 그리고 그곳에서 자맥질 치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한올한올 풀어낸다.

이 두껍지 않은 소설집은 매스 미디어가 홍수처럼 배출해 내는 공허한 활자 쓰레기보다 더 진실 되고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그리고 노동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니 아직도 이런 원통하고 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니!’ ‘세상은 어디를 향해 질주해가고 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하고 분통터질 듯한 이야기 앞에서 작가는 결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진지하고도 낙관적 시선으로, 삶 속의 갈등과 화해를 익살과 버무려가며 펼쳐 보인다. 그 속에는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과 이모, 때묻지 않고 세상에 주눅들지 않는 아이 해동이도 있고, 그리고 하루하루 숨가쁘게 노동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도 담겨 있다. 그 이야기의 세상은 말 그대로 우리들의 노동현장이고 삶의 현장이다.

‘노동소설’이나 ‘노동현장’이라는 구절에 우리들은 책장을 미처 열어 보기도 전에 미리 움찔하며 불편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숭어의 꿈>은, ‘도식적’으로 고착화되고 경화되어버린 이미지로 우리들의 머리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런 노동소설이 아니다. ‘노동소설’이라는 구절 속에 혹시라도 담겨있을지 모르는 선입관을 떨쳐버리게 한다. 자본과 노동 속에서 벌어지는 적대, 남녀 사이의 사랑과 갈등, 가족 속에서 벌어지는 따뜻한 이야기와 눈물어린 아픔 등 삶이 뿜어내는 감동을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건강함, 그리고 경쾌함으로 버무려 낸다. 이는 마치 한 폭의 크로키와 같이 활물적이며,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순간’인 동시에 동적인 ‘흐름’이다.

작가는 분명하게 말한다. “현장의 시계는 멈춘 지 오래다. 달라진 것이라고 아무 것도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똑같다.” 또 작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현실의 이야기를 끝낼 수가 없다.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생생한 현실 속에 두 발을 단단하게 디디고 작가는 꿈꾸기 시작한다. 그 꿈은 바로, 던져 놓은 미끼를 물지 않는 숭어가 파아란 바다 위를 역동적인 몸짓으로 솟구쳐 올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꿈이다. 이러한 숭어의 꿈은 삶의 현장에서 묵묵하게 숨죽이며 살아가지만, 그러한 묵묵함을 딛고 수직으로 솟구쳐 올라 자신의 자율적 삶을 쟁취하고 구성해 내고자 욕망하는 노동자․인간의 꿈을 상징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러한 꿈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나는 작가와 더불어, 그리고 이러한 꿈을 꾸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국경과 인종을 넘어 꿈꾸기를 희망한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꿈으로 연결․접속되어 연대할 수 있는 그런 “황홀한 솟구침의 그 순간”을 나는 오늘도 꿈꾼다. <숭어의 꿈>의 책장을 넘기는 당신도 이러한 꿈에 동참하기를 감히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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