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카뮈에게 집착했지만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됐다. 물론 아직도 그 글을 읽으면 심장이 뛰지만 그 끝엔 결코 내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카뮈는 죽음 너머를 규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화합과 사랑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부터 되자고 하며 세계를 진솔하게 대함으로써 연대를 중시하는 대신 죽음에 대한 공포(혹은 질문)로부터 회피했다. 그런데 세계를 진솔하게 대하는 자세부터가 쉽지 않다. 나의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것에 가장 큰 문제점은 헤어짐에 있다. 내가 죽든, 너가 죽든 어느 한 명이 죽으면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 나는 언젠가 나와 영원히 끊어질 사람들을 때때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정말 이대로 끝인가? 하는 불안이 엄습한다. 어떤 교수는 사람이 죽어 우리 곁에서 원자의 형태로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편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반려동물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사람의 수명에 비견될만큼 길게 살지는 못한다. 나는 많은 걸 미리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언젠가 그 귀엽고 따뜻한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가는 걸 생각하면 처음부터 마음 주지 말자는 생각이 점점 거대해진다. 아픔을 겪고 나면 성숙해진다는데 나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마음 한구석에 한 아이를 담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감당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그 부분을 담아낸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학습하는 AH27반의 동물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애기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 사이에 보이는 주인들의 시선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나를 대입해보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반려동물이 그들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지만 이 책에선 그렇지 않다. 인간이 될 준비가 되면 환생을 하러 간다. 운이 좋으면 주인을 만날 수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꼬리가 사라지면 인간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그 말은 즉슨 이전에 있던 미련들을 털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주인을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머루가 앞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머루의 주인이 머루가 남긴 그림을 보고 머루의 영원한 행복을 빌어주며 환생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차라리 환생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부처도 예수도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 재미없는 교리들뿐이다. 열반에 이르러라? 하나님 믿고 천국가세요? 열반에 이르기엔 내가 가진 사랑이 많고 하나님을 믿기에는 내 믿음이 나약하다.
나의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부터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아득바득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집착한다. 우리의 기억만이 관계를 지탱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과 영화, 아침에 산책하러 나가면 나를 반기는 어떤 고양이, 내 친구의 소중하고 귀여운 강아지, 나의 락스타와 그의 6만원짜리 반팔.... 나열하고 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그럼에도 그것들과 아무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없는 내가 정말 어이가 없다. 다같이 순장 한번 하면 좀 마음이 편할까? 다들 어떻게 성숙해졌나요? 어떻게 그 수많은 작별인사와 이별을 견뎌내는 거지?
작가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의 귀여운 AH27반이 이겨낸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위안이 되었다면 그건 그대들이 성숙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미련한 중생이라 부처도, 예수도, 카뮈의 그 어떤 글도 내 마음 깊숙이 들어오지 못했다. 언젠가, 어쩌면 오늘 당장 나도 누군가와 작별을 하겠지만.. 하.....일단 빡큐 삼창하고 생각해야겠다.
이러한 두려움을 모두 물리치고 내가 작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정말 성숙한 어른이 되어있겠지. 언젠가 나도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