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경보가 전국에 내려진 무더운 여름날, 선풍기를 틀어놓고 김지혜님이 쓴 「가족 각본」을 읽었다.
책명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가족 각본이라니? 무슨 말이지?’
6.25 전쟁 이후 태어나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는 나는 전통적인 가부장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가 주선하는 직장동료의 아들과 중매결혼을 했다.
그 후 7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막내 시누이를 결혼시킬 때 까지 집안의 관혼상제를 모두 책임지며 대가족을 위해 쉼 없이 봉사하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온전하게 나 자신의 삶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이 책의 1장에서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 될까’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솔직히 ‘이게 무슨 말이지?’라고 의아했다.
‘성별에 따라 정해지는 가족질서는 사람의 본성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질서라고 할 수 없다.’ ‘三從之道의 도덕규범은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규범이다.’를 읽으면서 ‘맞아 맞아!’ 하며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보았다.
남존여비와 시댁, 친정집의 호칭문화가 당연시 되는 시집살이를 하면서 억울하고 서러운 생각이 들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많이 늦었지만 2019년 국립국어원에서 새로운 언어예절 안내서를 발간하고 전통적인 가족 호칭•지칭을 대안적 사례로 제시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성별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차별을 받는 일은 우리 자식들 세상에서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가 모두 평등한 대접을 받는 문화가 정착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살기 행복한 곳이 되지 않을까?
2020년 2월 코로나 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하고 이후 거리두기가 계속되면서 엄격한 가족행사가 간소화되기 시작하더니 2022년 9월 성균관에서는 ‘대국민 차례 간소화 회견’을 발표했다.
1981년 1월 갓 결혼한 신혼시절부터 흰머리가 희끗한 나이에 이르도록 최소한 한 달 전부터 생선과 전 등 차례상, 제사상 준비에 허리가 휘도록 장을 봐 나르고 준비를 했는데 왜 이제 와서 전을 부치지 않아도 된다고 발표할까?
아니 아니 우리 세대야 그렇게 살았지만 우리 자식 세대에서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으로 바뀌면 그걸로 만족해야지!
결혼을 당사자의 결합이라고 보는 나라에서는 며느리나 사위의 위치가 다를 리 없고 며느리와 시부모 사이에 특별히 기대되는 역할도 없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부모들은 며느리나 사위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있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불변의 가치인가?’
작가의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왜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런 고민을 당연시 여겼을까? 가족 중 한 사람의 희생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순응하기만 했을까? 여성은 일찍부터 자녀양육의 책임을 가졌고 정조의 의무는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아무런 의문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인 내용이었다.
결혼제도에 있어서도 살펴볼 일은 또 있다.
우리 사회가 결혼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입장에 무관심했다는 정도를 지나 각종 혜택에서 배제되고 차별되었다는 것, 초저출산의 원인을 파헤치고 대안 제시하기, 성교육의 바람직한 방향, 부양의무의 두 얼굴,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 등에 공감이 갔다.
한부모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이주배경가족, 조손가족, 비혼가족, 동성커플가족, 트랜스젠더가족 등 모든 가족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다. 헌법 제36조 제1항이 보장하는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의 권리임을 확인했다. 누구나 다양한 모습의 가족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하도록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최근 국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동생활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2023년 용혜인 의원이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 장혜영 의원은 ‘가족구성권 3법’을 대표 발의했다고 하니 반가운 이야기다.
현재 우리는 부조리한 가족 각본을 벗어나 모두의 존엄하고 평등한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의 박수를 거듭 보내고 싶다.
우리 자식들, 손자들 세상에서는 모두의 인권이 소중하게 대우받는 진실로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부모의 마음으로 염원한다.
그리고 다소 느리긴 하지만 우리 사회도 올바른 방향을 찾아 변화되고 있다고 실감한다.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