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별로 독창적일 것도 없고, 특이하지도 않은 일반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얘기가 스치듯 지나가고, 현재의 생활이 모자이크처럼 얽혀 눈 앞을 휙휙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재미 없었다. 그래서 대충 빠릿빠릿하게 읽어 나갔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추천하는 이유를 중반부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배가 난파되었다.
폭풍이 불어 배가 부서지고, 주인공은 동물원의 짐승들과 함께 배 위에 갇혀 표류하게 되었다. '로빈슨 크루소', '15소년 표류기' 와 같은 '표류 문학(??)'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내 눈이 드디어 반짝이기 시작했다. 책장을 넘기는 손놀림도 조금씩 느려지고, 인상 깊은 대목은 두 번 세 번씩 읽어가며 머리에 새겼다. 미스터 파커와 소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오싹하면서도 즐거워서 '우리 집에도 저런 호랑이가 한 마리 있으면 어떨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망상도 잠깐씩 했다.
온갖 고생을 거듭하던 소년은 마침내 구출되었다. 그러자 해운 회사의 직원들이 소년에게 난파의 경위를 물었다. 소년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
책을 덮기 전, 최후의 몇 장으로 이렇게 내 머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책은 일찌기 없었던 듯 싶다. 마지막 몇 장의 임팩트는 앞서 읽었던 내용들을 머리 속에서 깡그리 삭제해고, 소년이 진지하게 던지는 질문만이 뇌리에서 뱅글뱅글 맴돌게 했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나는 벵골 호랑이와 함께 오랫동안 생존했던 소년에게 경의를 표하며 책장을 덮었다.
이건, 그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