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 자리에서 후딱 읽어치우기에는 부담스러운 책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시종일관 유쾌한 패러디와 농담이 뒤덮고 있는 책이라 책장이 술술 넘어가더라. 이 책은 말 그대로 '묵시록' 이지만, 심각한 분위기 따위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책을 펼치는 첫장부터 책을 덮는 마지막 장까지 농담으로 일관한다. 왜냐고? 그냥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프래쳇과 닐 게이먼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다.
수많은 수식어들과 장황한 문체 때문에 얼핏 어지러워 보이는 문장들을 헤치고 책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면, '지구를 멸망시킬 적그리스도가 수녀들의 실수 때문에 엉뚱한 집 아기가 되어 버리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천사와 악마는 그 평범한 아이를 자기네 편으로 교화시키려고 별의별 생쇼를 벌이다가 결국은 지구 종말의 날이 와버린다- 그런데 과연 지구는 멸망하려나?' 이다. 결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천사와 악마가 쇼를 벌이든 말든 상관 없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거다. 주제는 Let it be. 걍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고 살게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전개 자체는 간단한 편이므로, 아무래도 책 전체를 뒤덮고 있는 농담, 패러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더욱 눈길이 간다. 특히 많은 사람이 '원츄'를 날린 기아, 역병(가엾게도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인해 설 자리를 잃고 오염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전쟁 등의 4대 악마에 관한 발상은 그야말로 훌륭하다. 그러나 웃음의 이면으로 눈길을 돌려 보자. 프래쳇과 게이먼은 '인간' 의 특성을 정말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천사보다 선할 수 있고, 악마보다 악할 수 있는 존재' 가 그들이 묘사하는 인간이라는 생물체다. 성녀와 살인범이 한날 한시에 살아가고 있는 곳이 지구이고, 때로는 무한대로 선해졌다가 뒤돌아서면 바로 악해지는, 모순덩어리인 존재가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신과 악마가 모두 필요하면서 -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하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러므로 지구를 굳이 멸망시킬 필요는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스시도, 퀸과 비틀즈도 있는 천국인 동시에 - 다른 한편으로는 성가시게 구는 통신 판매원과 교통체증 또한 존재하는 지옥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냥 자기 멋대로 굴러가게 놔두자. 이렇듯, 책장을 덮은 뒤에는 지구 종말도, 천국도 다 의미없는 것처럼 느껴져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이 세상을 상당히 좋아하니까, 천사님과 악마님 모두 지구를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다는 거다!
사족 조금.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덮고 있는 영국식의 비틀린 유머에 동양권의 독자들은 상당히 난감해할 듯 싶다. 사실 우리와 정서도 다르고, 사회적 배경도 공유하지 않는 저 먼 섬나라의 이야기를 우리 말로 옮겨 놓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영국이라는 나라에 익숙치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게 무슨 말이야?' 하고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 이 점을 감안하고 책을 보지 않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생뚱맞고 지루한 책이 되어 버리므로 주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