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우울과 몽상

이 책은 아무래도 이언 피어스의 초기 작품인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핑거포스트 1663'과의 비교는 되도록이면 삼갈 생각이다. 15년 전, 아직 햇병아리(까지는 아니라도)에 가까운 시절에 썼던 작품과, 오랜 세월 동안 연륜이 쌓여 원숙해진 다음 쓴 작품을 비교하는 건 아무래도 불공평한 일이니까. 처음부터 멋지게 완성된 작품을 써내는 축복은 아무 작가나 받을 수 있는게 아니잖은가.

책을 보고 리뷰를 적을 때마다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실이지만, 난 이런 소설을 읽을 때엔 항상 '그 책이 사회상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에 중점을 두어 책을 읽는다. 이 점에서는 합격이다. 내가 생각하는 '라파엘로의 유혹' 의 가장 큰 가치는, 겉으로는 화려하게만 보이는 미술계의 이면을 뒤덮고 있는 어두운 뒷얘기들을 유머를 섞어 자세하게 풀어 냈다는 점이다. 역시 '미술사' 라는 작가의 전공은 속일 수 없는 걸까. 주인공 중 한 명인 아가일은 마치 이언 피어스 본인의 분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책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이합집산이 정신없이 반복되는 이탈리아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은 상당히 낯익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듯 싶다.

또한 이 책은 쉽고 빠르게 읽힌다. 미술사와 더불어 각종 미술 기법에 관한 전문 용어들이 등장하지만, 각주도 적절하게 달려 있고 피어스 본인이 어려운 단어들을 등장 인물들의 대화 속에 쉽게 풀어놓기 때문에 막히는 부분 없이 술술 읽히는 편이다. 그런데 이건 이 책의 단점이기도 하다. 너무 쉽게 읽혀진다. 그래서 작가가 여기 저기 단편적으로 깔아 놓은 복선들도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과 함께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고 만다. 이러면 나름대로 반전을 준비해 놓은 결말이 쌩뚱맞은 것이 되어 버린다. 결말을 보고 난 후 그 어이없음에 '이게 뭐야!' 라고 중얼거리며 책 앞부분을 다시 뒤적거려 본 다음에야 작가가 이런저런 곳에 단서를 남겨 두었음을 알았으니, 이건 나의 부주의함인지, 아니면 친절한 피어스씨의 과도한 배려였는지..

작가의 초기작인 것을 감안하면 꽤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다. 잘 모르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조금 더 넓혀주었기 때문일까. 물론 전개가 지나치게 빨라 여기저기에 비약하는 느낌이 강했고, 플라비아와 아가일의 로맨스를 풀어나가는 점에서도 미숙했으며(이런 부분은 대선배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한 수 배워야 할 듯), 전체적인 구성에서 느슨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너그럽게 넘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괜찮은 작품이다. 단, 아직 핑거포스트 1663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 소설부터 읽은 후 그것을 읽으시길. 그것부터 읽은 후 부푼 기대감을 안고 책장을 넘기면, 아무래도 실망감부터 엄습할 것 같다는 노파심이 든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