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공은 '사회과학 전체와 교육학 일부, 약간의 인문과학' 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이 전공이 아니라고 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닌, 몹시 애매모호한 '사회교육' 이다. 그러나 일단 '사회교육' Social education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사회학을 지적인 배경으로 깔아 놓고 들어가는 편. 사회교육과마다 커리큘럼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 학교는 확실히 일반사회, 그것도 사회학과 정치학 중심이라 아무래도 그쪽 분야를 더 심층적으로 배우는 편이다.
그래서 '사회학개론'은 절대로 배워야 하는 필수 전공이다. 그런데 1학년 때 사회학개론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몇 해 앞두신 나이 지긋하신 분이셔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난 사회학개론과 사회사상사를 비교적 옛날 책으로 배웠다. 대략 한문이 책의 1/3분량을 차지하고, '~것이다' 와 어색한 번역투가 난무하는 책들이다. 다행히 난 어릴 때부터 내 나이의 두 배는 더 먹은 낡은 책들을 많이 읽어 와서 그런 책들에는 익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차라리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뒤르케임의 '자살론' 같은 저서들을 다이렉트로 읽는 쪽이 더 이해하기 쉬울 정도였으니. (그래도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는 괜찮았다. 한문이 많다 뿐, 번역 자체가 나쁘게 된 건 아니었고 코저도 대학 교재로 쓸 요량으로 책을 집필한 만큼 정리를 잘 해놨으므로)
그러다가, 요즘은 기든스의 '현대 사회학' 을 읽고 있다. ('제 3의 길' 로 일약 스타 저자가 된 영국의 사회학자) 사회학 개론서들 이것저것 보다가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짜집기해 붙여놓은 그 내용의 한결같음과, 그보다 더 한결같은 짜증나는 난해함에 '원저보다 난해한게 무슨 입문서냐!' 라고 외치며 집어던져 버리곤 했는데, 기든스는 확실히 세계적 석학답게(그리고 학자로서는 정말 되기 힘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답게) 뭔가 달라도 달랐다. 일단 쉽다. 그리고 재미있다. 굳이 어려운 단어 쓰지 않고도 개념들을 잘 풀어 설명하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현상을 여러 가지 사회학적 관점에서 구조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학 교재를 제공하겠다는 목적에 충실하게 단원의 말미에는 요약과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하는 적절한 문제들까지 잘 덧붙여 놓았다. 어려운 걸 어렵게 설명하는 건 쉽다. 그러나 어려운 걸 쉽게 적절한 예까지 덧붙여가며 설명하는 건 그 내용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존 사회학자들의 이론부터 현대의 포스트모던적 담론까지를 현대 사회의 실상에 맞게 알기 쉽게 풀어서 재미있게 설명하는 이 책을 보고, 입문서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몇 번을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소위 말하는 사회학 개론서며 입문서들을 보라,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어지기는커녕 이런 골치아픈 학문 따위 때려 치우고 싶어진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책은 'OO개론' 이라는 말이 붙은 책이며, 그건 말 그대로 '개'론(犬論) 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물론 모든 책이 그런 건 아니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난해한 '개'론 책들을 사회학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또는 별 관심은 없지만 학점 따려고 들으려 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 활자보다는 인터넷에 익숙한 요즘 학생들은 점점 어려운 책, 글자만 가득한 책을 읽기 싫어한다. 이런 학생들에게 내가 배웠던 것 같은 개론서를 주면 10페이지도 못 읽고(우선, 그들은 대개 한자 읽기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때려치우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걸로 사회학을 시작하라고 하면 '뷁' 또는' 섊' 이라는 알 수 없는 합성어를 질겅질겅 씹듯 내뱉을 것이다.
물론 점점 쉬운 것만을 찾는 현상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어려운 책이 좋다' 라는 고정관념은 바뀌어야 하지 않나? 어려운 책이 좋은 책이라는 편견 내지는 고정관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걸까? 나에겐 그 발상은, 학자들이 일반 대중들과 차별되는 자기들만의 지적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해 머리 맞대고 고안해 낸 일종의 묵계나 다름없이 느껴진다. 특히 입문서적이나 개론서적은 더욱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 책들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거 괜찮은 학문인데?' 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지, 더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잖은가.
친구와 후배들 중 자기 전공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적이 있다. 도대체 자기가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고, 특히 사회학 강의 들을 때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얘기들이 많았다. 사회학에 대한 혐오증상을 나타내는 사람까지도 있었다. 만약 한문이 1/3을 차지하는 난해한 개론서가 아니라 기든스의 '현대사회학' 을 교재로 삼아 배웠다면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사회학이 이렇게 재미 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을까? 사회학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좋은 학문이라고 여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자기가 뭘 배우고 있는지 모르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입문서, 개론서의 역할은 이렇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그 학문에 대해 가지는 인상을 좌우하고, 학문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할 수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도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입문서와 개론서의 본분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학자들이 늘어나는 듯 하여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다. 정말 '어려운 책이 좋은 책' 이라는 희한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건지, 아니면 학창 시절에 애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후배들을 어엿비 녀겨 28자를 창제하는 대신 쉬운 개론서를 쓰기로 마음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