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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몽상

원래 추리소설은 작가와 서평을 보고 꼼꼼하게 고른다. (물론, 그래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때가 많지만..) 그러나 가끔은, 기대하지도 않고 별 생각없이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질러버린 소설 중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고 기뻐할 때가 있다. 이 작품이 바로 그렇다.

(작품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 이 책을 본 사람들은 꼭 표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동서추리문고에서 나온 모든 소설 중 가장 민망한 표지 디자인 아닌가 싶다. 게다가 표지와 내용의 연관성이 거의 없다! 왜 이런 표지 디자인을 했을까.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한 표지 디자인이 구매 의욕을 떨어뜨리긴 하지만, 소설 자체는 상당히 볼만하다. 1940년대 후반, 암울한 기운이 감도는 일본의 분위기가 잘 살아있는 가운데 문신 수집광인 교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의 동료(라고 해야 할지 제자라고 해야 할지 조수라고 해야 할지)인 주인공이 등장하여 뜬금없이 사건에 휘말린다. '문신' 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와 '삼자견제'와 같은 독특한 용어들이 사건에 흥미를 더하고, 작품의 전개도 상당히 빠르다. 후반부까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나 사건이 해결되기 직전, 정말로 파일로 반스를 연상시키는 웬 엄친아 탐정이 뜬금없이 등장하여 등장인물들의 엄청난 고생을 뭉개 버리듯 너무나 손쉽게 미스테리를 풀어 버린다. 민망한 표지 디자인과 함께, 여기서 또 마이너스 1점. 책의 3/4 정도 까지는 내가 주인공이 된 심정으로 정말 재미있게 읽어 나갔는데, 뜬금없는 훼방꾼에게 방해받은 느낌이랄까. 아둥바둥거리는 주인공을 제껴두고 잘난 탐정이 사건을 휘리릭 해결하는 구도는 셜록 홈즈와 그의 친애하는 왓슨 이래 추리 소설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수법이 되었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아무래도 이런 점이 이 시대에 발표된 미스테리의 한계일지도.

반 다인의 일명 '정정당당한' 추리소설 또는 일본의 본격파 미스테리를 자주 읽으신 분들이라면 범인 정도는 쉽게 맞출 듯 싶다. 전체적인 느낌은 일본풍의 S.S. 반 다인 소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에 오히려 만족감은 컸다. 잘 짜여진 본격 미스테리를 저렴한 가격에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한다. (팁 : 지하철에서 읽으려면 책 겉을 싸주는, 역시 만만치않게 민망한 선전 문구가 적힌 종이는 버리지 말고 꼭 가운데를 가려주는 센스를 발휘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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