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무리’, 노랫가락을 닮은 이 단어는 멕시코 타라우마라
족의 또 다른 이름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빨려 들어가듯 책을 읽어치운 뒤, 나는 대번에 멕시코의 깊은 협곡 속으로 달려가버린
이들이 좋아졌다. 타라우마라 족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부족의 이름을 대었다는 어느 작가의 심경이 이해가 간다. 수줍음 타는 선한 얼굴에 걸맞게 가장 행복하고, 또 그만큼 강인한 부족. 그 비결은 ‘함께’ 달리는 데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몸을 잘 다룰 줄 아는 이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춤을 추거나 공을 차거나 방망이를 휘두르거나 빙판을 가로지르거나 현을 켜거나
건반을 두드리거나, 몸을 쓰는 일이라면 어느 분야든 그랬다. 이는 내가
몸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내 머리 아래 달린 몸은 내 것임에도 영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학창 시절 대부분의 아이들이 기다리던 체육 시간이 내게는 고역이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는 풍물 동아리에서 장구를 쳤다. 머리로 가락을 외우고 다시 팔로 가락을 옮기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하겠는데, 장구를 치면서 동시에 이리저리 뛰며 진을 그려야 하는 설장구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권투 도장과 수영장, 헬스클럽을 전전하다가 어떤 운동도 하지 않게 된 지금은 출퇴근길 버스를 따라잡을
때나 헉헉대며 뛸 뿐이다.
『본 투 런』의 저자 크리스토퍼 맥두걸은 이런 내게 부러움을 잔뜩 안겨준다. 몸을
쓰는 기쁨을 아는 데다, 탄탄하고 재기 넘치는 글까지 쓸 줄 안다니! 급류와
모래언덕을 타며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전장을 내달리던 이 사내는 가장 단출한 준비물, 즉 몸만 가지면
시작할 수 있는 달리기에 유독 약했다. 그러던 그는 운명처럼 잡지 속 사진에서 일별했던 타라우마라 족을 좇아
울트라러너로 거듭났고, 동시에 인류의 진화와 행복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본 투 런』은 그 과정과
결과 전부가 담긴 책이다.
맥두걸은 인간이 달리기 위해, 달리도록 태어났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달리는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며 이제껏 더 잘 달리기
위한 진화를 거듭해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 진화의 영역은 신체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 미루어 짐작하는 능력까지 아우른다. 오랜 옛날 사나운 부리도 발톱도 없는 인간은
사냥감보다 더 오래, 사냥감이 지칠 때까지 뛰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달리기는
살아남기 위해 마땅히 취해야 할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현 인류는 유구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삶에서
벗어나 책상 앞에 붙박여 살기 시작하면서 온갖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신대륙을 찾아
밀고 들어온 외부인들로 인해 일찍이 없었던 병에 노출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타고난 신체 구조와 몸에 새겨진
삶의 모양에 거스르며 질병 같은 불행 앞에 섰다.
달리기는 자연스런 인간 삶의 양식이며 인간다움의 표현이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달릴 수 있는 타라우마라 족이 가장 행복한 부족이기도 한 이유다. 그렇다면 달리기로 이룬 진화의
정점에 있는 듯한, 아니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타라우마라 족의 달리기는 무엇이 다른가? 타라우마라 족은 맨발로 뛴다. 더 안전하고 빠른 달리기를 보장해준다는, 색색으로 물든 나이키 운동화는 맨발에 씌우는 가벼운 족쇄일지 모른다. 다름
아닌 나이키의 ‘맨발로 달려라!’라는 카피가 맨발의 우월을 인정하는
자기 고백이 아닐까? 그리고 타라우마라 족은 함께 뛴다. 야구공만 한
나무 공을 차며 달리는 타라우마라 족의 달리기 경기 라라히파리에는 성별의 구분도 나이의 구분도 없다. 가장
느린 사람도 공을 모는 역할을 맡는다. 그저 가장 빠르게 달려 남을 제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라히파리는 함께 즐기는 놀이다. 달리기의 원초적인 즐거움과 함께 살기에 이들은
가장 오래, 가장 멀리 달릴 수 있다.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축제처럼 즐기는 레이스를
눈으로 좇으며 몇 번이나 낄낄대고 마지막에 가서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다가, 오랜만에 잊었던 감각이 떠올랐다. 공강 시간 동아리 방에서 혼자 장구를 연습한 끝에, 마침내 어느 동작을 성공시켰을
때 느꼈던 성취감. 그리고 그걸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의 즐거움. 방울진을
말며 가락을 마구 휘몰아칠 때 몸을 감싸던 고양감과 전율.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접하는 원시의 축제에서 단순한
박자와 동작을 반복하며 무아로 빠져드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내게 이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풍물놀이는
정해진 순서를 다 끝내면 '난장'을 펼친다.
공연의 주체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모두 어우러지는 장이다. 원 밖에 있던 사람들이 원 안으로 들어와
내가 맸던 장구를 자신의 몸에 걸치고 같이 가락을 친다. 문득 그 난장판이 그립다. 혼자선
느낄 수 없는 그 즐거움이.
인간이기에 달리며, 함께 뛰기에 행복하다는 『본 투 런』은 과학적 근거를 갖춘 르포르타주이자 인문서로 지적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눈을 뗄 수 없게끔 만드는 서사로 몰입의 즐거움까지 안겨준다. 책의 말미 라라무리와
함께한 가장 위대한 레이스에서 절정에 다다른 이야기는 불꽃처럼 폭발하고, 그 재미는 어떤 소설과도 능히 겨룰
만하다.
이 책을 읽으면 몸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당장 움직이고 싶어질 것이고 몸 쓰기에 서툰 사람은 조금
더 능숙해지고 싶어질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 아무래도 난 달리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그냥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이 책, 미치게 재밌으니까.
코리마는 ‘카르마’와 비슷한 뜻이다. 나눠줄 수 있는 것을 나눠주는 것은 나의 의무이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즉시 나눠주어야 한다, 지금 내 손에 들어 있는 물건은 원래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타라우마라 족은 통화 제도가 없으므로, 코리마가 그들이 비즈니스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들의 경제는 호의를 교환하는 것이며 가끔 옥수수맥주가 든 냄비도 교환했다. - p. 59
앙헬의 말을 빌리면 라라히파리에서 혼자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마누엘 루나 같은 슈퍼스타도 온 마을의 지원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가족과 친구들은 주자들에게 수시로 피놀레를 주어 원기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아카테 가지에 불을 붙여 주자들이 어둠 속에서 달릴 수 있게 해준다. 이런 힘든 경기를 견디려면 힘, 인내심, 끈기, 협동, 헌신 등 타라우마라 족의 덕목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리기를 좋아해야 한다. - p. 65~66
굳이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는 타고난 주자인 때가 있었다. 기억하는가? 어렸을 때 항상 천천히 달리라고 어른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았는가? 어릴 때는 무슨 놀이든 전속력을 다했고 깡통을 찰 때도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옆집 안마당으로 쳐들어갔다. 무엇을 하든 기록을 세우는 데 열중했고 생애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달렸다. - p. 141
숲 속에 홀로 있던 노인 비질은 갑자기 깨달았다. 뭔가 알 것 같았다. 거대한 무언가를 알게 됐다. 이건 단순히 달리는 방법이 아니다. 사는 방법이다. 우리가 어떤 종인지,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다. - p. 151
"땅 위에서 땅과 함께 달리면 영원히 달릴 수 있다."- p.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