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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 그날, 12월 31일
  • 김준수
  • 14,850원 (10%820)
  • 2022-10-05
  • : 31


세기말이었을 때 나는 두려웠고 세상은 어수선했다. 매스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종말을 언급했고, 컴퓨터의 인식 오류로 비행기 사고가 날 수 있다며 경고등을 깜빡거렸다. 사람들은 징후에 더 겁을 먹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해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개중에는 세를 불려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밀레니엄의 마지막 해인 1999년 당시 나는, 아니 우리는 말세 중에서도 말세의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몰랐기에 잠시 시간의 유랑자가 되어야만 했던 그 시절, 그 긴박하고 무거웠던 이야기를 작가 김준수가 들려준다.

개인이나 역사의 사실을 개변하지 않으면서 비어있는 시간 속에 허구를 넣어 직조하는 소설을 팩션이라 한다. 김진명의 소설들이나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 김훈의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책들이 이런 갈래다. 그렇기에 팩션은 다른 문학 장르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요구된다. 사실과 허구가 씨실과 날실로 정교히 짜여지지 않으면 제한된 시간안의 작은 공간을 채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 12월 31일』은 김준수 작가가 처음 지은 소설이다. 그간 에세이와 신학 서적을 출간했던 그가 오랜 시간 가슴에 품어온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토하듯 써 내려간 후 내놓은 것이다.

이 소설엔 3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전직 신문 기자이자 서술자인 현수와 그의 여자 친구이자 고고학자인 희재, 현수의 영적 스승이자 전직 대학 교수인 이필선이 그러하다.

이야기는 1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오가며 펼쳐진다. 이필선을 만나기 전까지 현수의 삶은 부초처럼 떠돌았다.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지만 감정에 서툴던 현수는 희재를 떠나보내야 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에게 이필선과의 만남은 가뭄 끝의 단비 같았다.

이필선은 작은 공동체를 이끌며 종말을 준비하는 집단의 교주다. 대학교 교수였던 아내와 같은 날 정년 퇴직한 후 이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로지 종말의 그날을 고대하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지낸다. 이필선의 행적이 현수의 삶과 이어지면서 서사는 긴박하게 돌아간다.

이필선 부부와 현수는 1년 넘게 함께 지내다 종말의 비밀을 쥔 이스라엘을 찾아 도움을 줄 사람을 구한다. 그러다 현수의 옛 여자 친구이자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의 교환교수로 있는 희재와 재회하게 된다. 이들은 희재의 도움으로 전 지구적 종말의 비밀을 풀어줄 다윗의 열쇠를 찾기 위해 쿰란 동굴에 간다.




이필선은 1999년 12월 31일 예수가 재림하면서 지구와 인류 문명은 끝이 나고 지상에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이라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는 이필선 부부가 강하게 붙잡고 있는 유일한 소망이다.

현수는 지지부진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필선을 따라 나선다. 현수는 유토피아가 저 멀리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가 누리며 살아야할 어떤 것이라 깨달으며 이필선과 갈등을 겪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점점 뜨거워진다. 반면 내 마음은 조금씩 서늘해지는데 어떤 질문으로 인함이다. 이필선과 현수의 이야기가 결국은 지구의 종말이 아닌 한 개인의 종말을 네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귀착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네가 종말론적 관점으로 살고 있느냐는 더 깊은 질문으로 나를 찔러서이다.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를 읽었을 때, 내용엔 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독자를 견인하는 튼튼하고 풍부한 서사와 탄탄한 구성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댄 브라운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그 중 『천사와 악마』라는 책은 전율이 일 정도로 캐릭터를 생생히 구현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김준수의 소설도 그랬다. 성경에 단 한번 언급됐다는 다윗의 열쇠를 찾아 행군하는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 묘사가 빼어났다. 개연성이나 아귀가 맞지 않으면 팩션의 재미는 반감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더 흥미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흥미만 유발하지 않는다. 다윗의 열쇠를 찾는 여정을 통해 사랑과 신뢰, 삶과 죽음, 신앙과 이성, 희생과 헌신 같은 묵중한 주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게 한다.

삶에서 어떤 시간은 짧고 어떤 시간은 길다. 모든 시간의 의미가 같을 수 없어서이다. 이 소설은 2천 년보다 길었던 1999년 12월 31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당신도 그 여행에 함께 하기를 권한다. 내가 이미 함께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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