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은 망했고 빨리 돈이나 벌러 나가자’는 심정으로 문학동네에 입사했다'는 저자 이연실은 15년 차 편집자다. 자칭 잡종 에세이 편집자이고 타칭 잘나가는 편집자다. 뼛 속까지 문학도인 자신이 문학동네에서 맡은 첫 업무가 아닐 비(非)가 붙은 비문학이라 처음엔 속상해서 삐뚤어지고 싶었단다.
"얀마, 너 이건 기회야. 여기서 에세이랑 비소설 편집을 익히잖아? 그럼 나중에 다 할 수 있어! 소설이든 인문서든 논픽션이든 그림책이든 다 척척 만들 수 있다고. 근데 그 반대는 어렵다? 일단 여기서 닥치는 대로 해 봐. 그럼 나중에 네가 원하는 어떤 사람이건 이야기건 다 책으로 만들 수 있게 될 테니까." 12쪽
이연실은 선배 편집자의 위로에 마음을 달랜 후 투지를 다진다. 하지만 에세이가 어떤 장르인가?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남기 어려운 장르 아닌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잘할 수 없는 분야가 에세이다. 사람들마다 인생 스토리는 책으로 몇 권을 쓰고도 남을 만큼 있고, 절절함도 이야기 보따리만 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넘친다.
이런 가운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만드는 것이 편집자의 몫이다. 예전엔 독자의 눈을 끌기만 해도 어렵잖게 구매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서점에 가보면 예쁜 책표지에 파스텔톤의 사진과 그에 걸맞는 글씨체, 하다못해 여백마저도 이야기가 되는 에세이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잘 만드는 것과 책이 팔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편집자의 어깨는 그래서 늘 무겁다.
에세이는 내게도 각별한 장르다. 지금은 다른 단체로 이관됐지만 우수 문학도서의 심의를 했을 때 맡았던 장르가 에세이였다. 촉박한 일정으로 심의를 하게 되어 막판엔 책 4권을 펴놓고 읽다 지치면 다른 책을 읽는 방법까지 동원했는데, 무리를 해서 양쪽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경험까지 하게 됐다.
그래서인지 내가 주로 읽는 장르는 에세이다. 비교적 범위도 넓고 선택의 폭도 넓어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고 부담이 없어 좋다. 최근에는 이 책이 출간된 유유에서 나오는 책들을 종종 읽는데, 유유의 책을 만날 때마다 '요즘에도 이렇게 편집하는 곳이 있나' 웃으면서 사고 또 산다. 단순하지만 가독성이 높게 편집 되어 그런 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은 목차가 반을 먹고 들어간다(
#뭘먹는다고라 #책을묵는다고요!) 목차를 보면 이연실이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드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 '제목발' 무시하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제목으로 책의 운명을 움직여 보았는가-내가 제목을 짓는 세 가지 방법· 띠지 문안은 편집자의 간판이다-눈에 띄지 않으면 띠지가 아니니까· 계약서를 꺼낼 때와 집어넣어야 할 때-에세이 기획의 타율 높이기· 유명인의 책에서 인기와 팬덤보다 중요한 것-SNS 팔로워 수와 인지도에 속지 마라· 나는 예술가보다 생활인이 좋아요-생활의 달인을 작가로 만들기· 작가들과 잘 놀기, 그들의 말 기억하기-그리고 내상을 다스리는 법에 대하여
이 책의 부제는 더 많은 독자를 상상하는 편집자의 모험이다. 직설적으로 풀자면 읽히는 책은 어떻게 만들고, 많이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책엔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이야기만 담겨 있고 시종 유쾌하다. 때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이야기도 스릴 넘치는 여장부의 활약상으로 느껴진다.
한데 이 책을 읽다보면 영 다른 색깔의 편집자인 글항아리의 이은혜가 떠오른다. 일하는 방식도 책을 보는 관점도 다른데 그녀들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성향은 다르지만 작가를 좋아하고 책에 몰입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가장 좋은 것을 추출해내는 방법이 비슷해서는 아닌가 생각해본다.
#여걸들이로구만이연실은 그간 김이나의 『김이나의 작사법』,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과 같은 에세이를 만들었다. 다 중쇄를 거듭한 책들이다.
이는 독자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접점은 어디에 있으며, 저자와 독자가 친밀하기 위해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고민했기에 얻은 결과이지 싶다.
"사실 난 에세이가 싫었다." 이연실이 이 책에 담은 첫 글이다. 그녀는 그 후 "한번 해 볼까?"를 거쳐 에세이를 만들수록 자유로움에 빠져들면서 그 시간들 속에서 한 시절씩을 살았다. 작가에게서 발견한 가장 아름답고 독보적인 삶을 책으로 만들었고, 매대에 놓인 책이 독자의 손에 잡힐 때까지 궁리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이연실을 추동하는 것은 에세이다. 그녀는 에세이를 통해 세상을 보고, 에세이로 한 사람의 생을 한 권의 책으로 치환한다. 열렬히 사랑하고 치밀하게 준비된 책들은 세상에 나가 제 몫을 감당하기도 했고 때로 실패해 아픈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연실은 나아갔다. 그 행보의 끝이 어느 때까지인지, 어떤 모양으로 그려질지 아직 모른다. 단지 가장 큰 선물이 주어질 수 있다면 스티븐 킹의 쓴 이 말이 아닐까 싶다.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