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수용소라니, 그것도 중국에 있는.
절대 반갑지 않을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좋다고 권하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만나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 장의 이런 문구와 함께 권한다면 한결 부담없이 읽을 것 같다. 부담없이 안심하고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p7
이 책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당시 중국 북부에 있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의 이야기다.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한 내용은 없다. 우리가 수감된 위현(현재는 산둥) 수용소에는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정신적인 고통은 없었다. 뒤에 인용해놓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문장*이 암시하듯,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억류한 일본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초래된 것들이 더 많았다. 따라서 아시아와 유럽에 있던 다른 포로수용소와 비교하면, 우리가 수용되었던 곳의 삶은 거의 일상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_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2차 대전 중 중국에 장기 체류하던 서양인들이 일시에 수용소로 보내지는 일이 일어났다. 1943년 3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약 2천 여 명의 미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산둥수용소에 수감된 것이었다. 원래는 중학교, 병원, 교회가 함께 있던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로 쓰였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수용소치고 억압과 고문이 없고 인간적인 환경이었다고는 하지만 기약이 없이 이처럼 수용된다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날 지 아무도 몰랐고 따라서 이들의 신변도 어떻게 될 지 앞날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그마한 괴로움이라도 기약이 없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저자인 랭던 길키는 이 수용소에 수용된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카고가 고향인 그는 미국의 대학 부속 예배당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중상류층 전문직 가정에서 태어나 전쟁 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20대로 북경에 살면서 근처 연경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과 이곳 수용소로 옮겨진 후 그는 일기를 쓰면서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일기를 마무리 지었고 20년 쯤 뒤에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원본 출간년도는 1966년이다. 상세하고 성실한 기록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끝을 알 수 없는 수용소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먹고 자는 일 같은 자잘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 본성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서구인들이라 대부분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 안락하던 상황에서 종교에 대해 했던 말과 행동과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많이 다르다. 앞서 인용한 브레히트의 대사처럼 자신의 생존의 문제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상상 이상으로 욕심과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의 자연스런 모습, 그중에서도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며 저자는 인간의 본능에 긍정할 만한 것이 있는가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문명과 기술은 무엇을 근거로 발전하고 있는지, 도덕과 윤리는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지 질문한다.
인간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나도 이렇게 착한 척을 하긴 하지만 나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자신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마치 새로운 인물로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성품을 드러내며 살고 싶어 할까. 지금까지 때로는 약간 포장하기도 했던 내 역할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긴 했지만 내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고 보여주던 내 모습은 약한 포장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가톨릭인과 개신교인들의 양태가 지금 우리나라의 두 종교인들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인들은 겉과 속이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이고 특히 수도자들은 공동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크게 놀랄만한 것이 없었는데 개신교인들은 우리나라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렇듯 위선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북미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슷한 모습으로 닮아가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종교인들의 어떤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나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도 그렇게 발견할 수 있을까?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은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살면서 이 책에서 등장했던 어떤 사람과 같은 인품의 사람을 만난다면 또 생각이 날 것 같다.
p175
서구 사회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탐구자와 지식인으로 여긴 것은,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시대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 문화는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 기술적 발견이 주는 경이로움에 취해 있었고, 이런 발전으로 가능해진 공간, 시간, 무게, 추위, 열, 병의 정복에 매료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회는 이런 업적을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문제의 해결로 오해했으며, ‘지적’ 인간을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바르게 사고하는 존재로 오해했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현대 문명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완전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인간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인간은 과학자요 기술자로서 이런 가치들을 보여왔으므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종교 신앙마저 쇠퇴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런 낙관적 이미지가 함축하는 미덕에 우리 미래의 소망을 걸 수 있다는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과학 기술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 수 있으려면, 인간은 정말로 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악하고 비열한 편견과 열정에 사로잡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으면 쉽게 타인을 해하거나 죽일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확고한 믿음을 가진 과학자가 아니다. 이런 존재의 손에 들린 과학적 무기는 인류에게 있어, 극단적으로 인류의 전멸은 아니라 할지라도 장애물을 의미할 수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어둡게 조명해보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더 새롭고 깊은 불안인 듯 하다. .. 따라서 인간을 바르게 인식하면 과학기술이 스스로 진보한다는 믿음도 흔들리게 된다. ... 내가 수용소에서 경험한 바처럼, 이런 이상은 거짓된 꿈이었다.
p347
스미스필드는 지적인 사람이었음에도, 자신의 행위에서 모순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확신을 가진 어조로 말했다. “흡연은 분명히 죄이기 때문에 나는 내 카드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었어. 내가 오둘 수 없는 최라면, 그 죄에 대해 관여하지 않기라도 해야 하지. 그리고 담배를 판 일에 대해서는, 우리 애들이 우유를 원하니까 팔았을 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나?”
p417
삶이란 일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의 일부가 되지 못하면 삶은 끝나버린다. 반면에 세상에 다시 동참하게 되면 삶은 다시 시작된다.
p428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들은 지성을 가진 기독교인이 증명 불가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 종종 놀라워한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본주의자들의 주된 신념인 인간의 선함, 그리고 거기에서 자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인 인간의 도덕성은 어떠한가? 사실 조금만 연구해보면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증명 불가능한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반대되는 증거가 널려있는데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인본주의자의 태도 또한 비합리적임에 분명하다.
p434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유일한 소망은, 인간의 ‘종교성’이 수많은 우상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나누고,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도 정직하며, 공동체를 세울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반드시 인간은 의미와 안정성을 제공하고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바칠 수 있는 영적 중심, 자신의 복지를 초월하는 영적 중심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가족, 나라, 전통, 인종, 교회 같은 중심은 물론 개인보다는 위대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 하나님만이 진정한 영적 중심이 될 수 있다.
... 각 사람의 궁극적 관심은 이웃과의 싸움을 더 심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대신 이런 싸움에서 인간을 구해야 한다.
... 그렇기 때문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처음으로 이기심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복지를 잊고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어떨지 알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둔다.
... 이런 신앙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 중심성을 포기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향한 이 자기 포기의 원리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라 불리는 것의 기반이기도 하다.
... 즉 구원은 내적인 평안이고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며 주위 세상과 이웃을 향한 창조적인 관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
... 이런 의미의 믿음은 흔히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이라고 일컫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믿음이란 일련의 신조나 성경적 원리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경건의 규칙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과, 앞에서 이야기했던 자아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생각과 입술로는 위대한 진리에 동의하고 행위로는 경건과 거룩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의 중심은 자아의 육체적이거나 영적인 복지에 이기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