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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인권운동이라는 날갯짓



1.

2019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어쩌면 올 한 해는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었던 2018년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죽음으로 시작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지난 11월 21일 자 <경향신문> 1면을 빼곡히 채운, 이윤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1,200명의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명단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명단에 들지 못하는, 산재로 인정도 못 받은 이들을 비롯한 무수한 생명의 죽음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9년 인권운동을 돌아본다. 여전히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른바 ‘태극기 집회’로 표상되는 집단의 몰상식과 후안무치, 기득권이 되어버린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위선과 ‘사회적 합의’라는 기만에 맞서 고군분투했고, 공정함이 은폐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드러내고 평등을 이야기하며 존엄성을 지키려는 이들과 함께했다고 말하고 싶다. 


“진정한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 반면 새로운 것은 태어날 수 없는 때이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빈자리에 괴물이 나타난다.”


장애를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파시즘에 온몸으로 그리고 ‘위험한 두뇌’로 저항했던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이다. 1928년 그람시의 재판에서 파시스트 검사는 “저 두뇌를 20년 동안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고 결국 그는 20년 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혔다 9년 뒤 사망했다. 물론 지금이 100여 년 전, 1차 세계대전 후 대공황 속에서 파시즘이 기지개를 켜던 당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세계적인 위기의 징후들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호를 준비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머니즘 담론, 속도를 따라잡기 힘든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대리모와 난자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 DNA 조작으로 맞춤형 아기가 가능해진 첨단 생명공학, 그리고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묻는 기후 위기.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인권이 여전히 쓸모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 편집위원회에서 던져졌다.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이 물음에 대한 우리 나름의 응답이다. 동시에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그래서 운동이 현실에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하는 질문이기를 바란다. 



2. 

첫 번째 실린 류은숙의 ‘변화된 지형에서 인권 담론의 재구성을 위하여’의 문제의식은 폭 넓고 깊다. 또한 현재 인권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난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먼저 인권운동이 처한 위치와 그 배경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정치의 빈곤과 관계의 파괴, 권리 담론의 범람과 혼탁, 불의에 대한 공통감각의 위기로 설명하며 그에 따라 “임시적이고 배제적인 ‘우리’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만한 권리 체제를 상호 선물하는 새로운 ‘우리’의 세력화”를 주문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첫째, 특정 집단의 이익을 보편적 권리로 포장하는 ‘통념적 인권론’, 사회와 갈등하지 않는 ‘순치된 인권론’을 넘어 인권을 복잡하게 이해하려는 노동을 통해 그 토대와 보편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공허한 개인주의에 갇힌 원자적 개인이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의존의 관계 속에서 존엄성을 구축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시민권의 재구성이 가능할 때 “기존 권리 체제의 내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에 반대하는, 부정성에 기댄 운동의 한계를 넘어 보수의 언어로서의 책임이 아닌 사회적 문제와 연루되어 있다는 책임을 통해 “다양한 처지와 입장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공통감각을 재구성”할 것을 주문한다. 그럴 때 오직 집단적으로만 쟁취될 수 있는 권리, 서로에게 부여하고 서로가 보장하는 진정한 인권과 해방의 정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토대와 보편성의 재구성, 사회적 시민권의 재구성, 연루됨과 책임을 통한 공통감각의 재구성은 결국 낡은 권리의 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인권론, 인권 담론의 창조를 병행하는 작업이기에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꿈꾸고 만들어가는 인권운동이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 


류은숙의 글이 인권 담론 재구성에 대한 총론이라면 나영과 수수가 공동집필한 ‘젠더를 다시 만나기’와 정록의 ‘사회적 노동권, 새로운 싸움과 권리의 가능성’은 각론에 해당한다. 


먼저 ‘젠더를 다시 만나기’는 그간의 인권운동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거나 젠더를 여러 권리 목록 중 하나로 재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으로 “부정의와 불평등의 구조를 다루는 도구”로서 젠더를 적용하여 권리 개념의 한계를 검토하자는 제안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성을 강조했던 인권운동과 여성의 특수성에 기반을 둔 여성운동은 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폭력에 함께 저항했으면서도 미묘한 갈등과 마찰이 있어 왔다. 필자들은 이를  보편성과 특수성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보다는 두 운동 모두 젠더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과 젠더 주류화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서 기인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젠더를 권리 영역의 하나이거나 정체성의 범주로서가 아니라 젠더 개념을 인권운동 전반을 분석하는 범주로 사고하는 것, 다시 말해 젠더적 관점으로 인권 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젠더가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회의를 통해 알려진 뒤 미투 운동 전후로 한국 사회와 사회운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면 노동은 멀게는 해방정국에서부터 1970~80년대를 거치며 체제 변혁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었으나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급속도로 해체되고 힘을 잃은 개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정록은 글에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권과 노동세계가 신자유주의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피며 자본이 외주화를 통해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을 해체하고 개별화하면서 자본의 사회적 성격은 강화된 반면 그 책임은 은폐되었다고 지적한다. 과거 노동이라고 하면 월급을 받기 위해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을 뜻했다면 현재의 노동은 각종 프랜차이즈 자영업, 개인사업자로 일하는 배달, 운수, 판매업, 콘텐츠제작과 문화예술노동 등 정규직, 비정규직이라는 말로 묶일 수 없는 다양한 행태가 되었고 거기서 87년 체제에서 비롯된 노동삼권은 더 이상 아무 효력을 갖지 못한 채 개별 노동자들은 무권리 상태로 내몰렸다는 것이다. 하기에 이러한 힘의 방향을 돌리고 “개별화되고 위계화된 노동자들이 함께 설 공통의 토대이자 권리”로 사회적 노동권을 제안한다. 사회적 노동권은 이윤이 있는 곳에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개별 근로계약 관계, 기업별 체계를 넘어 자유롭게 단결하고 행동하고 그 힘으로 책임을 묻기 위한 교섭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노동삼권, 노동기본권의 확장을 뜻한다. 이는 결국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국한된 권리로서 노동권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공동체의 평등한 시민으로서 지향해야 할 노동에 대한 권리를 만드는 일이기에 인권 의제 전반에 대한 변화와 재구성의 토대와 조건을 구성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 종의 횡포와 자연에 대한 자본주의의 착취와 수탈에 지구와 생태계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한 편에서는 동물에 대한 대량학살이 반복되고, 한 편에서는 반려동물이 인간 공동체의 관계망에 구성원으로 등장한 상황에서 인권운동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이 쉽지 않은 주제로 여성주의 철학연구자로 에코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황주영 님과 풀뿌리운동과 아나키즘으로 인권운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던 전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 하승우 님을 모시고 ‘종의 권리를 넘어서는 인권/운동은 가능한가’라는 좌담을 진행했다. 좌담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인권 담론을 더욱 정교하면서도 풍성하게 해주리라 기대한다. 


마지막 글은 일곱 명의 인권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한 기사다.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지역과 부문, 연령과 활동 기간 등을 고려하여 안배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편집위원회는 이 저널의 가장 중요한 수신자인 활동가들의 고민과 저널이 담은 문제의식 사이의 거리와 만남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 더불어 인권운동 현장에서 솟아나는 생생한 목소리들을 더 널리 전파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2019년 한국 인권운동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생각과 활동을 하고 있는지, 거기서 어떤 2020년대를 함께 그리고 있는지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3.

2020년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해이다. 2019년 해넘이를 며칠 안 남기고 인권운동의, 무엇보다 청소년인권 운동의 오랜 숙원이었던 만 18세로 선거 연령이 하향 조정된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다가올 총선에서 당장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제도권 정치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여러 방면에서 분명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보수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학제 개편이 선행된 후 또는 학제 개편과 병행하여 선거법이 개정되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 18세로 선거권이 낮아진 것보다 고등학교 3학년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현 제도에 더 큰 균열을 낼 것이고, 그것이 나비효과에서의 날갯짓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국 사회운동의 한 축으로 존재했던 진보정당 운동이 결실을 맺어 민주노동당이 다수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원내에 진출하던 2004년 무렵 인권운동은 진보정당과 꽤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국회 입법운동에서만이 아니라 인권침해 현장에서도 다양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고, 이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기획들이 시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서로가 서로를 도구적 관계로만 여겼기에 서로의 변화를 추동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크다. 그때와는 사회도 바뀌었고 인권운동도 진보정당도 변했기에 그 당시의 상황이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2020년 인권운동이 진보정당을 비롯한 제도권 정당들과 그리고 다른 사회운동과 어떤 관계 맺기를 하고 어떤 도전을 할 것인가는 다시 새롭게 도래하는 질문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당면한 인권운동의 고민과 연결 지으면서도 또 어떻게 하면 거기에만 머물지 않을 것인가는 이 저널이 계속 품고 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무솔리니 정권은 그람시를 감옥에 가둘 수는 있었지만 그의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서슬 퍼런 검열을 뚫고 살아남아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저작이 되었고 변혁 이론과 실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저널에 실린 글들, 우리의 전언도 현실의 여러 어려움과 복잡함을 헤치고 여러분과 그렇게 만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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