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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포장마차 혹은 르포르타주reportag

작년에 쓴 이 글 때문에(덕분에?) 무려 네 군데나 불려다녔다. 이제 좀 새로운 내용의 글과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여전히 게으르다. 


첫 발표는  9월 20일 세계인권선언 70년 '문제적 인권, 운동의 문제 토론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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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제안이 있다. … 이들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남기를 원하든, 다른 결정을 하든 이들의 의사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들의 결정을 유엔이 개입할 것도 아니고, 한국과 북한 정부가 내릴 것도 아니다.” -토마스 오헤아 칸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


“인권위를 포함해 우리 국민 모두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들 탈북 여종업원들이 탈북 시점에서 자유의사로 탈북했는지 여부를 솔직히 말할 수 없는 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들 중 일부가 재입북을 희망한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여행의 자유가 있는 이들이 제3국을 통해 재입북하면 되는 일이다.” -자유한국당 김영우 국회의원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던 북한


국가정보원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중국의 북한 식당 종업원 12명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북한은 12명 전원 송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고, 민변과 유엔 특별보고관은 독립적인 기구의 진상조사를 전제로 이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자유한국당과 보수우익 단체들은 이들에게 자유의사를 묻는 것 자체가 반인권적 행위라며 ‘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상규명조차 반대하는 저들의 저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북한에 있는 종업원들 가족의 처지를 고려할 때(북한에서 외국 근무는 상당한 사회적 신분이 보장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그 ‘딜레마’가 솔직히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이 사건이 지금처럼 첨예하게 정치적 이슈화가 되기 전 이른바 ‘조용한 외교’를 통한 접근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남북, 북미 관계가 급진전하여 탈북민과 이산가족 모두에게 남이든 북이든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된다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만약 그런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1984년 강원도 한 부대에서 남한 병사가 동료 15명을 죽이고 북한으로 넘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후 그 병사는 북한에서 훈장도 받고 북한 매체에 나와 ‘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사는 월북 대표선수’가 되었다. 1995년경에는  GOP 초소에서 술자리 다툼 끝에 중사가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이 중사 또한 며칠 뒤 귀순 영웅으로 ‘삐라’에 등장했다. 지난 2월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는 만취 상태에서 차를 운전하다 사고를 낸 후 탈북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공식적으로 북한은 1950년부터 1999년까지 6446명의 공작원을 남파했고 남한은 1951년부터 1972년까지 7726명의 공작원을 북파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도 여전히 남북 모두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이자 숙제로 남겨져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분단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인권, 인권운동은 수많은 딜레마를 만나게 될 것이다. 



















한국 인권운동에서 북한 문제, ‘북한인권’은 언제나 딜레마이자 뜨거운 감자였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량 기아 사태가 알려지고, 일부 보수언론을 통해 러시아의 북한 벌목공 노동 실태가 보도되면서 ‘인권’을 빙자한 반공주의의 확산과 노골적인 체제 붕괴 시도에 대한 경계와 우려가 인권운동 안에서 고민되기 시작되었다.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한 직후였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지 불과 채 10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2004년 경에는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 움직임을 계기로 통일운동단체와 시민단체, 인권단체가 함께하는 비공개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들어진 이 테이블도 북한의 인권 문제 제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과 그 어떤 정치적 배경과 의도도 배제한 채 ‘동포 돕기’라는 인도주의만을 주장하는 입장의 긴장 속에서 결국 유의미한 활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권의 보편성과 한반도의 특수성, 그리고 사회운동의 복잡 미묘한 진영논리 사이에서 인권운동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인권결의안 문제는 보수세력의 정치공세에 단골 메뉴가 되었고 다양한 경로로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의 숫자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분단체제의 조난자, 탈북민


정부가 ‘먼저 온 통일’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통일부에서는 새터민, 과거에는 귀순자, 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 한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있는 탈북민 중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고 싶다고 응답한 이가 20%라고 한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탈남한 사람들이 2000명,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이 800여 명이고,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도 28명에 이른다. 탈북민이자 통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주승현 교수는 스스로를 ‘조난자’로 호명한다. 탈북민은 분단이라는 재앙을 맞아 난파된 존재라는 것이다.  



















여론조사들은 판문점회담 이후 북한과 김정은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탈북민의 SNS에는 “북한으로 돌아가라”,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 해봐”라는 등의 온갖 모욕적인 댓글이 달린다. 어느 탈북민 약사는 “한국에서 우리는 이등 국민이고 장애인처럼 사회에 적응 교육을 받고 재활해야 하는 존재”라며 한국의 정착지원 사업을 비판한다. 


탈북민은 헌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한국 국민이다. 이들은 자기 결단에서든, 외부적 요인에서든 자기가 태어나 성장했던 사회와 체제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문화적으로 북한 사회는 핏줄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가부장제, 유교적인 사회다. 북한의 교육은 우리 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이루자며 우리 민족 제일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오랜 기간 북한 주민에게 휴전선을 넘어오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많은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야 나라가 직업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알아서’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참으로 당혹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탈북민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받는 차별에 훨씬 민감할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중반 국가인권위원회 토론회에 나온 탈북민은 자신이 받은 차별을 증언하며 “솔직히 말해서 남한은 친구를 잘 만나서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고, 북한은 친구를 잘못 만나서 저렇게 가난해진 거 아닌가”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여전히 다수의 탈북민은 스스로 조선족이라 밝히며 탈북민임을 숨기고 생활하고 있다.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통해 이제 본격적으로 난민 문제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만약 가까운 시기 해외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탈북민이 집단으로 한국행을 요구한다면 어떤 반응일지 걱정스럽다. 실제로 인터넷 공간에서는 탈북민에 대한 정착지원금과 생활보조금에 대한 불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북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도 연결된다. 흔히들 10대, 20대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가장 낮고 50대, 60대로 갈수록 높아진다고 하고 실제 여론조사도 그렇다. 그런데 한 연구에서 ‘통일로 인해 경제적 손해가 발생할 경우’라는 조건을 달자 40대 이상에서 급격히 찬성률이 낮아진다며 “기성세대의 통일의식은 위선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꼬집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북민 절대다수가 급격한 통일, 남한체제로의 흡수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면 한국 사회는 통일, 혹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속에 값싸고 질 좋은, 통역도 필요 없고 노조도 불가능한 노동력의 출현, 새로운 블루오션의 등장, 돈벌이가 되는 희귀 광물이라는 휘토류 등의 매장량에 대한 높은 관심, 판문점회담 직후 건설, 철도 관련 주가의 폭등 등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김정은과 세련된 김여정 뒤에 가려진 북한 주민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종편이 확대재생산하면서 소비하는 체제 순응적인 꼭두각시와 ‘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며 19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선량한 동포의 모습으로 대상화되는 가운데 갈등하고 불화하며 입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의 얼굴은 여백으로만 존재한다.    


3대 세습, 1당 독재와 정치범 수용소, 형과 고모부를 암살한 독재자의 나라. 꼭 TV조선을 봐야만 알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여러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의 북한 지역에서, 최소한 평양에서만큼은 아직도 무상주거,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실현되고 있다고 한다. 한 편에서는 분단 70년 동안 쌓여온 반공이데올로기 위에 편견과 악의적 선동이 횡횡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북한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 사이 빈자리를 혐오와 적대가 채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다시 생각하는 국가보안법


인권운동사랑방이 1993년부터 13년 동안 발행했던 팩스 신문 <인권하루소식>, 그 창간의 계기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간 인권운동사랑방 소속 활동가의 연행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인권단체의 주된 활동은 공안기관의 부당하고 위법한 연행을 막고, 구금과 고문 피해 사실을 알리고,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고, 석방된 양심수를 지원하는 등 국가보안법과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1980년대 변혁적 민중운동으로 바뀌는 가운데 등장한 민족해방 노선과 노동해방 노선 사이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남한 사회 계급혁명이라는 두 노선의 과제가 만나는 지점이자 초보적이나마 독자적인 인권운동 ‘진영’이 열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민가협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과 같은 문화행사, 하루감옥체험과 같은 퍼포먼스는 물론 200여 단체가 모인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중심으로 100만인 서명운동, 단식과 삭발, 집단 농성, 피해자 증언대회, 국제심포지엄 등 그야말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10년 동안 법의 폐지는커녕 단 한 조항의 개정도 이뤄내지 못했다. 


반면 확연히 줄어든 양심수의 숫자만큼이나 국가보안법에 대한 대중과 운동사회의 관심도 식어 갔다. 인권운동 내에서도 비록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만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 불처벌운동, 과거청산운동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자리를 대신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김근태, 서준식으로 대표되는 가장 급진적이면서 반체제적인 운동가이자 동시대 가장 가혹한 국가폭력에 맞선 민주주의자로 표상되었다. 그러나 ‘빨갱이’, ‘좌파’의 자리를 ‘종북’이 대신한 이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RO 내란음모 사건-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는 문화적으로 ‘후진’ 사람들, 시대 변화에 낙오된 운동권,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 모습으로 그려졌다. 통합진보당 사건은 평화통일의 동반자, 대화와 협상의 상대이면서도 대한민국의 ‘주적’, 정부를 잠칭하고 있는 괴뢰집단이기도 한 북한과 공존하고 있는 분단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만 ‘왜 위험한 사상을 품고 저항을 꿈꿔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은 봉쇄된 채 ‘종북’이라는 낙인찍기와 혐오, 마녀사냥만이 난무했다.



















그러는 사이 국가보안법의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했다. 원정화 간첩 사건, 황장엽 암살 간첩 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북한보위부 직파 간첩 사건. 모두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벌어진 조작간첩 사건이다. 이 사건들 외에도 미수에 그친 사건까지 대략 10여 건의 탈북민 조작간첩 사건이 현재 민변에 집계되어 있다.  


탈북민은 한국에 입국과 동시에 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최장 6개월 동안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으며 탈북 과정과 입국 경위는 물론 북한에서의 생애 전반에 대해 진술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거나 다른 탈북민의 증언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곧바로 국가보안법의 그물망이 좁혀 들어온다. 한국의 법 제도를 잘 알지 못했던 한 탈북민은 “한국에서는 마약범은 5년을 살아야 하고 간첩은 3년만 살면 된다”는 회유에 넘어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며 만기출소 후 민변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합동신문센터의 무사히 조사를 마쳤다 하더라도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은 뒤 사회에 나온 탈북민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중국 브로커를 통해 가족에게 돈을 전달하는 등 국가보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공안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엮을 수 있는 먹잇감, 잠재적인 간첩 ‘풀’인 셈이다. 


끊임없이 변주되는 ‘너는 어느 편이냐?’는 추궁


국가보안법을 무고한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를 양산하는 악법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의 문 앞에 선 문지기로 자기 검열 기재를 작동시키는 일종의 사회 규범이자 헌법 위의 법으로서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체제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테러방지법, 전기통신망법, 보안관찰법, 북한이탈주민보호법 등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하며 그 움직임이 멈춘 상태에서도 사람들의 내면을 규율하고 국제인권기준을 비롯한 인권의 보편적 원칙에 끊임없이 예외를 강요한다.  


이는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한국에서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헌법, 곧 공식 헌법과 함께 ‘이면헌법’이 존재해 왔다는 백낙청 교수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이면헌법, 국가보안법은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헌법을 해석할 권위를 갖고 있으며 때로는 헌법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동성애 반대로 결집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반공주의,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전현직 국방부장관과 장성들,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장에서 ‘천안함 침몰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느냐, 안 믿느냐’라며 사상검증이 벌어지는 작태, 그 질문이 성소수자 인권과 낙태의 찬반으로 바뀌는 상황, 대한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에 태극기집회 사람들이 난입해 ‘종북’ ‘빨갱이’라고 소란을 피우는 장면. 이 모두가 분단체제 아래서 이면헌법의 작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2018년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의 해이자 제주 4.3사건 70주년이며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겠지만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을 교훈 삼아 전 세계 인류의 이름으로 인권선언의 문구가 다듬어지던 바로 그 순간 제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한 제3세계 식민지에서 이제 막 탄생한 국가권력은 학살로 국가 만들기를 시작하며 앞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손에서 놓지 않을 국가폭력의 만능검을 벼리고 있었다. 


4.3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벌어졌다는 의미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와 연루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북한이라는 ‘국가’와도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분단체제의 극복이 체제의 통합이든, 두 체제의 비적대적 안착이든, 새로운 평화체제의 도래든, 체제의 극복 또는 분단 문제의 해결 없이 4.3사건의 진정한 해결, 진실 규명과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국가폭력, 국가범죄의 단죄는 국가에 대한 성찰,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계 맺음의 상상력으로 이어져야 할 터이지만 우리의 사고는 어쩌면 고립된 섬처럼 갇혀 있고 어느새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만들기는 “너는 누구 편이냐?”는 물음으로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것에서 출발하였으며 비국민은 곧바로 ‘적=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너는 누구 편이냐?”는 물음은 너는 종북인가, 너는 이성애자인가, 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가, 너는 군 복무를 마쳤는가, 너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가, 너는 성실한 납세자이며 근로자인가, 너는 순수한 시민인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하며 여전히 합동신문센터에서, 대공분실에서, 청문회장에서, 일터와 쉼터에서, 집과 학교에서 그리고 광장과 거리에서 오작동의 작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그해, 파리의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기 열흘 전 한시적이라는 조건을 달고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고 강정의 해군기지 문제, 소성리의 사드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기만 이때 인권운동은 과연 어떤 응답을 마련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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