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삐삐는편서풍중
  • 푸른 사자 와니니 4
  • 이현
  • 10,800원 (10%600)
  • 2022-08-19
  • : 8,502
[푸른 사자 와니니] 4권 작은 코뿔소 파투에는 유독 ‘하나뿐’이라는 말이 도드라진다.
‘초원에서 가장 귀한 동물’, ‘유일한 아이’ ‘단 하나’.
“온 초원에 나 같은 코뿔소는 하나도 없는 거예요?” (23쪽)

처음에는 외롭고 쓸쓸한 멸종위기종의 운명 같은 슬픔이 보였다.
그런데 유일함이 곧 초원의 다른 존재로 점점 확대되어 가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군데군데 작가의 유머감각이 넘치는 가운데 세심한 관찰력마저 돋보이는 얼룩말을 보자.
'가장자리부터넙적하게시작해서둥글게등을가로지르는무늬, 가는줄이나란하게등을타고올라이마에서둥글게휘어지며뺨을타고가는무늬, 가늘고촘촘하게등을지나얼굴을둥글게감싸며턱을지나가는무늬, 가지런히이어지다갑자기둥글납작해졌다다시가지런해지는무늬' (49-50쪽)에 파투만 아니라 독자들의 눈마저 돌 지경이다.
파투가 얼룩말은 다 똑같이 생겼다니까 '가아_누!' 소리높여 울며 경고하는 얼룩말들이라니. 가장 웃긴 장면으로 꼽겠다만, 각양각색의 얼룩말은 이야기의 큰 주제로 나아가는 길목이 된다. 이 다음에 코끼리와 코뿔소를 비슷해 하는 얼룩말에게 그건 아니라고 외치는 코끼리도 마찬기지 역할이다.

코뿔소 파투가 단 하나뿐이듯, 초원의 다른 모든 동물도 그렇다.
온 초원에 얼룩말이 그렇게 많지만 가늘다가불룩하게등을지나둥글게휘어지며얼굴을비스듬히가로질러콧구멍을스쳐가는무늬 같은 얼룩말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즉 유일하다는 특수성은 초원의 모든 동물에게 해당하는 보편성으로 확장되었다.

이야기의 끝에서 파투는 놀라운 깨달음에 닿는다.
" 초원은 대단한 동물들이 사는 곳이야." 마침내 파투가 답을 찾았다. (161쪽)
파투가 보고 겪은 대로 자연스레 흘러나온 이 답은 그래서 생생하고 뭉클하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똑같은 건 없기에, 다 다르고 하나뿐이기에 대단하다는 건 사람에게 쓰던 메시지 아니었던가!
여기서 나는 작가의 생태적 상상력이 어떤 경계를 넘어섰다고 본다. 유일함을 멸종위기종의 외로움, 쓸쓸함이 아니라
모든 동물의 위대함과 생명력으로 완전히 판을 바꿔 버린 상상력 말이다.

아직 기본적인 자유와 사회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는 가운데, 인권의 개념은 선언적인 일반 권리에서 특정 집단의 특수한 권리로 점점 구체화하고 그 범주가 넓어지고 있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인권'을 강조하는 일은 그 끝이 없다.
허나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 인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인권의 기본 테제, '너, 유일한 존재’라는 메시지가
의도하진 않았어도, 무의식적으로 인간에게만 적용되어 왔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서늘하다. 인간만이 고유 인격을 가진 유일한 종이라는 그 오만함 때문에 역사 속에서 의도적으로 다른 생명을 살육하고 지구의 삶에서 배제해 왔는지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치니까.
아뭏든 우리는 “동물이 살아 있고 지각하는 존재로서 법인격을 갖는다는 사실, 그들이 각자의 종에 적합한 환경에서 나서 살고 자라고 죽을 기본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을 종종 자주 까맣게 잊어버린다. (아르헨티나 멘도사 동물원의 침팬지 세실리아를 브라질로 돌려보내는 법원의 판결문 중.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 (193쪽)
그래서 '동물' 하나가 위대한 존재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거다. 아직 인권 신장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데 동물권까지 생각해야 하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는 인권과 생태-사회권을 방대하게 아우르는 대단한 저작이다. 내용 중에는 기후위기에 비해 현재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다뤄지는 생물다양성 붕괴 문제도 있다. 책은 생물문화다양성이 사라진 자리에 인권조차 지켜질 수 없단 걸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우리의 인권은 생태권과 함께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파투가 내린 답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건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은 못할지언정 평범한 침묵에 묻히고 싶진 않다.(인권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말을 달리하여, 앞의 책 317)
초원의 파투가, 가둥가가, 와니니가, 사람을 넘어 모든 동물이 ‘단 하나’임을, 그래서 위대할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이것이 바로 네 번째 [푸른 사자 와니니]의 환상적인 성취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