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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hon의 서재
  • 로르샤흐
  • 데이미언 설스
  • 25,200원 (10%1,400)
  • 2020-07-30
  • : 242

"이것은 무엇일까요?"




살면서 다들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 봤으리라 생각한다. 위의 카드는 '로르샤흐 잉크 얼룩 검사'에 사용되는 10장의 잉크블롯 중 한 장이다. 사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10장을 모두 확인할 수 있지만, 사전에 잉크블롯에 노출되어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가져 버리면 검사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노출을 지양하려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로르샤흐 검사를 발명한 헤르만 로르샤흐의 생애와 로르샤흐 검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로르샤흐: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의 저자 역시 출판사와 상의 끝에 몇 개의 잉크 얼룩만 책에 실었다.

 

초등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가끔 했던 수업이 기억난다. 스케치북을 한 장 찢어 가운데에 원하는 색의 물감을 바르고 반으로 접은 뒤 펼치는 활동이었는데, 물감이 묻은 이 종이는 사물함 위에 고이 올려놓고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실 뒤 초록색 게시판에 붙여 전시해놓고는 했다. 어차피 12색의 단순한 물감을 사용하는 데 친구들이 만든 결과물은 신기하게도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같은 그림을 보고 강아지, 곰, 벽에 그린 낙서 등 서로 묘사하는 대상도 달랐다. 그림 자체는 우연의 산물이겠지만, 그 그림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각은 그렇게나 달랐다.


로르샤흐 검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주어진 잉크 얼룩을 보고 이를 묘사하는 내용에 근거해 피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로르샤흐 검사는 "수십 년 동안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 미국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되고, 의료보험 회사에서 검사 비용을 환급받을 수 있는 검사가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직무 평가, 양육권 분쟁, 정신과 진료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심리검사이다."


하지만 이 검사를 발명한 헤르만 로르샤흐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로르샤흐 박사의 삶을 그의 부모에서부터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은 미국의 작가 겸 번역가인 데이미언 설스가 지은 '로르샤흐: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가 처음이라고 한다.


* * *


이런 심리검사를 만든 심리학자라면 왠지 딱딱하고 근엄한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하지만 로르샤흐는 "아이들의 놀이를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며 혼자 연구하던 젊은 스위스인 정신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다." 책을 읽다 보면 로르샤흐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지만 예술과 여행을 좋아하고, 조용하지만 한 번 빠진 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탐닉하는 학자의 모습. 게다가 그는 "키가 178센티미터에 몸이 늘씬하고 탄탄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고, 말투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빠른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꼼꼼하게 종이를 오리거나, 세심하게 나무에 조각을 새길 때는 손끝이 신중하면서도 경쾌하고 날렵했다. 공식 문서, 이를테면 스위스 남자들이 평생 지니고 다니는 군 복무 기록 수첩 같은 곳에는 그의 눈동자가 "갈색" 또는 "회갈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회색에 가까운 연푸른색이었다."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도 왠지 미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표지에 크게 박힌 브래드 피트를 닮은 로르샤흐의 얼굴이 이미 뇌리에 박힌 탓일까.




이 책은 크게 아래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로르샤흐의 성장기 > 로르샤흐 잉크 얼룩 검사 개발 과정 > 로르샤흐 검사의 전 세계(서구권) 확산 및 대중화 > 로르샤흐 검사의 발전


​주석을 빼고 58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서적이지만, 정신과 의사의 생애와 그가 발명한 심리검사를 다루는 책이지만,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마치 소설 같다. 작가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과 번역가의 출중한 능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책은 로르샤흐의 인생에 대하 굉장히 구체적이고 독자 친화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의 전기를 읽는 게 아니라 마치 드라마 한 시즌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이 정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구성할 수 있었던 작가의 자료 수집 능력이 감탄스럽다.


로르샤흐의 성장기는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로르샤흐가 어떻게 정적이면서 예술을 사랑하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그가 왜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로르샤흐의 선택과 성장 과정을 독자들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기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덕분에 그가 미술을 활용한 심리검사법을 발명할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마찬가지로, 로르샤흐의 학자로서의 성장 과정 역시 단순히 그에 대한 얘기뿐만 아니라 그의 두 스승, 오이겐 블로일러와 카를 융의 이야기, 그들의 학문적 성향과 차이, 그것이 로르샤흐에게 미친 영향까지 아주 상세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로르샤흐를 이해하는 데 아주 크게 도움이 되는 대목이다.


로르샤흐는 러시아 문화와 사람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스위스에서부터 러시아 출신 사람들을 자주 만났고, 큰 영향도 받았으며, 결국 결혼도 러시아인인 올가와 하게 된다. 러시아를 여행하고, 머물러보기도 하고, 유럽과는 달리 여성이 단순히 집에서 청소나 하고 애를 보는 사람이 아닌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 활동을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러시아 문화에 그는 큰 감명을 받았다. "로르샤흐에게 러시아다움이란 곧 느끼는 것이었다. 강렬하고 진심 어린 감정에 맞닿는 것, 그런 감정을 서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로 톨스토이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요령을 부리지 않아도, 유식한 말을 쏟아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부터 이해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로르샤흐는 여성인권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03년 7월 4일, 18세의 로르샤흐는 스카푸시아의 관례대로 회원들 앞에서 연설했다. 완전한 성 평등을 목청껏 호소한 이 연설은 <여성해방> 강연이라고 불렸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성이 "본래 신체, 지능, 도덕에서 남자에 뒤처지지 않고", 논리에서는 남자와 맞먹을뿐더러 용기는 남자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저 "여자들의 계산서나 지불하는 연금"이 아니듯, 여자도 그저 "아이를 생산하려고"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로르샤흐는 여성을 '하등한 처우를 받고 있으므로 인권을 증진시켜주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남성과 같은 하나의 개체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여성을 '우리'와 사뭇 다른 기이한 심리를 지닌 존재로 봤고, 융은 여성이 주로 집안일에 관심을 보이며 지성보다 감정을 더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자주 발표했다. 하지만 김나지움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던 로르샤흐는 물론 블로일러 역시 프로이트나 융과 달리 그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여성을 중심에 놓고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 * *


중반부를 지나며 책은 로르샤흐 검사의 완성과 이것이 자리 잡에 된 과정, 바다 건너 미국에 발을 디디며 광고와 영화, TV 쇼와 같은 대중문화와 투자 시장에까지 침투하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검사 자체보다는 로르샤흐라는 사람이 더 흥미로웠고 인상 깊었다. 그는 늘 박스를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야말로 눈앞에 닥친 환경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사람, 어디에서든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평생에 걸친 선택의 연속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로르샤흐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한 세기가 다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필드에서 사용되고 있는 잉크 얼룩으로 만든 심리검사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에는 그의 부모님, 두 동생, 러시아의 트레구보프, 그의 두 스승 블로일러와 융, 아내 올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환자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그가 생활한 스위스와 독일, 러시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잉크 얼룩을 보고 우리의 마음과 그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로르샤흐 검사가 일깨우는 가장 가치 있는 생각은 감정이입이 말이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감정이입은 곧 통찰하는 힘이다. 이때 우리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느낀 다음, 거기에서 자신을 보며 양쪽을 연결할 수 있는 무엇을 본다. 감정이입은 반사 환각이자 움직임 반응이다. 그래서 상상이나 어떤 감각뿐 아니라 섬세하고 정확한 지각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려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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