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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네의 일기
  • 안네 프랑크
  • 10,800원 (10%600)
  • 1995-05-01
  • : 6,359
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키티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식으로 가장 내밀한 고백을 적어간 이 일기에서 우리는 한 주체의 자기의식의 획득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이 책의 번역자나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전쟁문학, 고발문학, 페미니스트문학 등과 같은 규정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피상적이어서 우리에게 어떤 인식의 생산도 가능하게 하는 것 같지 않다. 즉, 이런 규정은 하나마나한 규정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이 일기가 널리 읽힌다는 그 보편성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과연 14~15세 소녀가 페터와의 사랑과 성, 섹스 등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해 기성질서를 대변하는 부모와의 갈등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할 수 있는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오히려 왜 안나가 그런 고민을 시작했고, 그것을 기록에 남겼는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문제를 던졌을 때, 이 일기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개인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은신처에서 있는 동안의 그 불가피한 가족공동체가 그야말로 안나가 유일하게 경험하고 체험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 따를 경우, 인륜적 세계는 개인이 사회로부터의 자립성을 획득하기 전의 역사이다. 즉, 이 때 개인은 자신의 외적인 실체로서 사회에 대한 자립성을 획득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내적인 의식과 외적인 실재 -대개 의무와 강제의 형태로 현상한다- 가 대립하는 것이 아닌 분리이전의 융합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좀 길지만, 잠깐 헤겔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의식과의 연관 속에서 자기의식이 상대방과의 통일을 의식하는 가운데 이렇듯 맞서 있는 대상적 실재와의 통일 속에서 비로소 자기의식일 수가 있게 된다. 이러한 인륜적 실체를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나타낸 것이 사유의 산물인 법률이다. 그러나 또한 인륜적 실체는 직접 현실을 살아가는 자기의식 속에도 스며들어 있으니, 이것이 관습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의 의식이 인륜세계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보편적인 의식이 자기의 것임을 자각하는 가운데 개인의 행위나 생활이 보편적인 관습을 벗어나지 않아야만 한다."([정신현상학1], 한길사, 2005, p.370~371)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이 세상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1944년 3월 7일 편지, 290쪽)라고 말하는 안네에게 독일의 헤겔을 들이미는 것은 안네 일가의 은신처의 회전 책장이 독일인에 의해 열리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니 더 이상은 삼가하도록 하자.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인륜적 세계에서 주체는 관습이라 불리는 보편적 의식과 하나가 되어야(통일되어야)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구분'이 부재하는 세계다. 자기의식과 타자(의식)의 구분, 적과 아군의 구분, (잠정적이지만)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참고로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유대인을 부정적 원리로서 반(反)종족이라고 했다.)이 부재하는 세계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안네가 끊임없이 토로하는 엄마와의 문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확인되는 아버지와의 거리감 등 부모와 안네와의 구분이 부재한 세계인 셈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안네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마지막 편지(1944년 8월 1일,445~447쪽)에서 자신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말하면서 내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구분을 하고 있는 자기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주체의 자기반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안나는 일기 곳곳에 자신은 자신의 감정과 행위, 표현 등에 대해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회학자 Mead라면 이를 'I'와 'me', '일반화된 타자' 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의식은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인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주체로서의 자신과 타자의 구별이 필요하며, 따라서 자기의식은 타자의 의식이 된다. 위의 헤겔의 인용을 참고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자기와 타자를 분리/구별할 수 있을 때, 인륜적 세계가 해체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안나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성장해가는 과정은 결국 자신의 외적인 실체로서 가족이라는 인륜적 공동체, 그 인륜적 질서를 담보하는 관습법적 '가족법률'과 대립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더구나 일기에서는 "신기하게도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의견을 가질 수 없다는 원칙만큼은 언제나 철저하게 지켜집니다."(1944년 3월14일, 298쪽)와 같은 관습적인 가족법률이 작동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화의 원리'라고도 불릴 수 있는 근대의 사회구성원리가 이 강고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외적인!' 사회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볼 때, 유명한 첫 날의 일기(1942년 6월 12일, 25쪽)인 "당신에게라면 내 마음속의 비밀들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 내 마음의 지주가 되어 나를 격려해 주세요."라는 일기는 아직 구분이 부재한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은)'예외적이지 않은!' 사회에 속한 안나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이는 이른바 주체화의 원리가 예외적인 상황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을 인식하고, 획득하게 되는 어떤 징표같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일기의 현재성을 설명하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이 일기를 가령 페미니즘 문학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규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그에 앞서서 이러한 '내적 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같다. 왜냐하면 페미니즘 문학이니, 전쟁문학이니 하는 것은 안나의 자기의식과는 별개인 사후적인 '외적 규정'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이 일기가 '성장소설'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글쎄, 여기서 다시 또 한번 독일인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말한 '아름다운 영혼'을 이야기하면서 회전 책장을 헤겔과 괴테를 위시한 독일 책들로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괴테의 경우에 개인의 발전과 성숙이 내적이고 정신적인 고양이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체험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아무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나의 마지막 일기가 자신의 성격의 이중성에 대한 자기의식을 보여주고 있고, 더구나 마지막 문장이 "내가 원하는 그런 인간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지. 하지만 꼭 그렇게 되겠어요. 만약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면요."(447쪽.)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나의 고유한 자기의식을 소유한 개별성(외적 규정에 의한 특수성이 아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규정의 강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안나가, '발각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륜적 세계'로서의 가족공동체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안나가 자기의식을 발견하고, 발전시켜나간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하고,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개별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인간의 정신은 위대하지만, 그 행위는 얼마나 하찮은가!" "Der Mann hat einen grossen Geist und ist so klein von Taten!"(1943년 11월 17일, 212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14살의 지적능력과 이와 같은 '예외상황'에서도 가능'하게 했던' 공부목록(1944년 5월 16일, 399쪽)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안네의 사회 간의 간극과 거리를 '위계적'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자격지심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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