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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도르노
  • 이종하
  • 8,820원 (10%490)
  • 2007-06-05
  • : 746
이종하 선생의 이 책은 간략한 아도르노의 연대기를 '음악적 삶과 국외자의 삶'으로 정리하고, 곧바로 '고통의 해석학'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아도르노의 주요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미학이론]에서의 연관부분을 중심으로 인용하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저자에게 두가지 점에서 감사를 표시해야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 세 저작을 모두 번역본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저자는 이 작은 책자에서 아도르노의 논의를 자연지배에 따른 계몽과 신화의 변증법의 문제설정에 따라 차분히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도르노의 사유는 그의 문체와 더불어 따라잡기 힘들다. 아마도 헤겔에 대한 공부가 어느정도 되어 있다면, 또는 음악(특히 말러나 쇤베르크)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가 선행되어 있다면, 우리는 아도르노의 논의를 이 끈을 잡고 (아도르노와 이 책의 용법을 빌리면) '체계화하지 않은 방식으로', 또는 '비동일자적인 방식으로' 따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형식으로든 아도르노를 이 작은 책자 안에 정리해야했을 저자의 곤란함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깐 아도르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철학은 어떤 범주들로 요약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구성해가야만 할 것이다. ... 철학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정적이다. 또 연역적인 것이든 귀납적인 것이든 어떤 직선적인 사고과정이 아니라 사고의 짜임(Geweben)이 결정적이다. 따라서 철학은 본질적으로 짤막하게 논평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대개 짤막하게 논평된다는 사실은 그 철학에 불리한 일이다."([부정변증법], 국역, p.91.)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아도르노의 철학을 불리하지 않게 어떻게 짤막하게 논평하고 있는지 염두에 둘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아도르노의 주요 3저작의 문제의식을 '자연지배'의 문제와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된 고통(저자는 특히 내적 자연의 고통을 중심으로 그러한 고통의 사회적 형식(본책 p.31~40)에 주목하고 있다.)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보존을 위한 외적자연에의 공포를 인간이 이성의 도구적 전유를 통해 자연지배에 도달하고 -저자는 이를 지배의 형식을 문제삼는 사회철학적 관점이라기 보다는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신화-계몽'(또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본책, p.22)의 역사적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몽은 신화로 다시 되돌아간다"라는 순환적 테제이다. 이 때, 인간의 의식과 심리로서 내적자연의 지배를 강제하는 사회적 형식이 결국 도구적 이성에 따른 목적-수단의 전도의 결과로 가능한 사회적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는 자연지배의 변증법의 문제가 된다. 이를 '신화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54) 저자는 주요 3부작을 거의 출판연도 순으로 정리하는 면밀함을 보이는데,-[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미학이론]의 순서- 그렇게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핵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구도'(constellation)와 '미메시스'(mimesis) 개념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개념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술하기 보다는 이 책의 [비동일성과 부정변증법](p.65~68)과 예술의 자율성을 '창문없는 모나드'로 정리하고 있는 부분(p.72), 그리고 예술과 관련하여 그리고 체계화하는 개념, 인식주관(인식대상이 아닌)의 지배계기와 대립하는 이른바 '고통과의 화해'의 계기를 담보하는 예술에서의 미메시스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p.73~80)을 보다 주의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잠깐만 덧붙이자면, 저자가 구도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부정변증법]의 국역자인 홍승용 선생은 이를 '짜임관계'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용어는 본래적 의미인 '성좌'로도 번역되고 있다.) Konstellation 의 경우 어떤 '짜임'(Gewebe)인데, 이를 아도르노는 "대상이 처해 있는 짜임관계 속에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자체 내에 저장하고 있는 과정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 마치 잘 보관된 금고의 자물쇠들처럼 그 개념이 열리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 때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부정변증법], 국역, p.242)라고 하고 있다. 이 짜임(Gewebe)에서 우리는 Max Weber 의 이름을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도르노는 '구도'를 설명하고나서 바로 '과학 속의 짜임관계'라는 절에서 Weber 를 논하고 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부분도 함께 읽으면 저자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구도'가 어떤 의미인지, 또 어떤 현재적 의미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메시스의 문제인데, 저자는 이를 주체와 객체의 분리 이전의 자연상태에 대한 기억이요, 상기로 정리하고 있다.(이 책, p.74~79) 즉 주-객이 분리된 이후 자연의 공포에 맞선 이성의 도구적 사용으로 인한 자연지배가 가능했고, 그렇게 계몽의 신화가 도구적 이성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기능'한 결과, 그러한 고통의 역사가 나치즘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으므로, 유일한 미메시스의 위치로 예술을 확인하고,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기억하고 상기해야 '계몽의 계몽'이 가능하며 '고통의 화해'가 가능해 질 수 있는 열린 공간(유토피아)가 확보되지 않겠는가라는 논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미메시스의 문제로 볼 때, '역설'로서 계몽의 역사는 '외적자연'의 지배를 통해 '내적자연'의 훼손, 망각, 상실, 퇴행 등을 야기했고, 이렇게 계몽에서 신화로 다시 돌아간다는 테제가 반복된다. 저자는 이를 다음의 인용을 통해 확인해준다. "주관 속에 있는 자연의 기억-이 기억을 완성시키는 것은 곧 모든 문화 속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을 통해 계몽은 지배 일반과 대립한다."(이 책, p.60)1 이렇게 본다면 이 책은 짤막하게 논평되는 것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아도르노라는 '구도'(Konstellation)을 우선적으로 '고통과 화해'라는 열쇠로 열어보려한 시도하고 할 수 있겠다. 덧붙여 마지막의 [고통과 화해의 철학, 그 이후] 장은 아도르노의 현재성을 확인하는 부분인데, 아도르노에 대한 최근의 비판적 문제제기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언급된 학자들의 관련 서적을 미주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편집상의 실수이겠으나,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국역본의 경우 몇몇 군데에서 쪽수를 잘못 표기한 경우가 발견된다. 가령, 이 책 56쪽의 인용은 [계몽의 변증법] 251쪽이 아니라 233쪽이다. 또한 이 책 66쪽의 인용은 [부정 변증법] 242쪽이 아니라 85~86쪽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도르노라는 구도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열쇠와 번호들의 배열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이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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