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란 제목에서 우리는 마치 잊혀진 것, 즉 80년대의 대학생의 대항문화-하위문화를 오늘날 복원하고 그것을 향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저자는 80년대 식의 문제설정에 따를 경우 궁극적으로 '계급' 개념을 비판에 붙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특히 2장 '공동체, 하위문화, 대중정치'는 본 저서의 문제설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장이다. 따라서 저자의 말과는 정반대로 독자는 2장만 따로 분리해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외 다른 부분들은 인류학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어도 우리의 경우 80년대 계급의 문제설정은 레닌의 용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동원'의 문제는 저자가 대결하고 있는 또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가령 대자적 계급의식을 위한 외부성테제가 사실상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욕망이나 자생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는 것이 본 저서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기 보다는 '발굴'하고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저자가 사용하는 대중정치라는 말은 계급정치를 대체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저자는 대중을 단순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즉 소시민적인 집단으로 범주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정치의 복원을 저자는 마치 레닌의 4월 테제였던 '소비에트에게 권력을'처럼 '대중에게 광기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최근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이론적 작업이 사실상 정당을 매개로 한 (정상적)대의정치의 복원, 계급적 구조에 대한 실질적 반영, 정치의 제도화에 대한 논의들이라고 한다면 저자는 학생운동의 조직화문제를 '기억'하면서 그것이 관료화되고, 제도화되었다는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베버의 용어를 빌면 이는 관료제(기계)의 문제일 것이다. 또한 저자가 기대고 있는 들뢰즈의 개념을 빌면 노마드적 전쟁기계의 복원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광기를 이라고 말했을 때 대중은 동원의 대상이 아니다. 그 때의 대중은 로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대중이고, 자발성 또는 자생성은 무의식적 힘이다. 니체라면 '긍정의 힘의 의지/권력 의지'라고 했을까?
80년대의 일반적 문법처럼 자발성을 '관념적인 쁘띠'라고 보는 대신 위로부터의 통치와 지배에 반하는 능력이요, 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과 해석'의 변화는 그것이 니체적인 만큼 근대정치의 문제틀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래서 저자는 '대중에게 광기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즉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법도, 질서도, 제도도, 사회계약도 더구나 규율이나 훈육, 포섭이 아니다. 대신 저자는 일종의 흐름(flow) 또는 결여나 결핍이 아닌 '넘침'의 상태로 욕망과 대중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근대적 정치의 문제설정을 '기억'하는 대신 '전망'하고 있는 저자와 대면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2장 4절 '대중정치'(107~111p)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주는 매우 충실한데 특히 이 부분의 주(30~42번)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참고문헌 목록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책은 알라딘의 분류처럼 한국현대정치사에 대한 책이 아니다. 아마도 망각과 기억이라는 역사(학)의 오랜 주제를 제목으로 사용한 덕분에 얻은 규정일까? 다분히 사회철학적인 토대에서 인류학적 연구를 접목시킨 저자의 연구에 큰 흥미와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80년대의 운동권 문화와 정치의 문제가 여전히 오늘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대신 그러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